‘우주항공 산업 잡아라’ 미·러에 도전장
냉전 이후 줄곧 미국과 러시아가 지배해 온 우주항공 분야 시장 쟁탈전에 영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영국 집권 보수당의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얼마 전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1000만 파운드 규모의 우주혁신센터 건립 계획을 밝히는 등 우주 과학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오스본 장관은 우주여행 상품 개발이나 통신 및 기상위성 등 최근 이 분야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규 수요를 강조하면서 지난 1986년 제정된 우주 개발 관련 법령과 규제를 전면 재검토할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에게 관련 법령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와 분석 작업을 의뢰했다.
지난 2010년 영국 정부는 이미 산·관·학 합동으로 2030년까지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서 영국의 시장점유율을 10%까지 끌어올린다는 청사진을 내놓은 바 있다. 현재 영국의 점유율은 6.5% 수준에 그치고 있다.
2007년 이후 연평균 10% 성장
보수당 정부가 새로 내놓은 우주항공 투자 계획은 이러한 20개년 계획을 뒷받침하는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물론 유인 우주왕복선 제작 및 조립, 발사와 같은 ‘전통적’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서 영국이 축적해 놓은 산업적·기술적 기반은 미국·러시아 등 선진국과 비교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중소형 상업 위성 등 최근 수요가 늘고 있는 새로운 분야에서만큼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1990년대 초 발사에 성공한 ‘우리별 1호’ 기술진이 위성 기술을 배운 곳도 바로 영국의 서레이(Surrey)대학이다.
영국 정부는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서도 자신들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소형 위성 기술 분야에 우선 역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영국 정부는 향후 10년간 이 분야에만 매년 5억5000만 파운드씩 투자한다는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이는 기존 정부 투자액의 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영국 정부가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 대해 그동안의 상대적 무관심을 깨고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성공 스토리에 힘입은 바 크다. 최근 260개 관련 회사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07년 이후 이들 회사들은 연평균 10%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실적은 영국 경제가 극심한 침체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의미가 더욱 크다.
그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 효과 면에서 제조업 분야에 비해 취약한 것으로 평가돼 온 하이테크 분야의 선입견을 깨고 1년에 15%의 고용 증가율을 보일 정도로 일자리 창출 효과도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 분야에서 영국 우주항공 산업의 미래를 이끌고 있는 회사는 아스트리움(Astrium)과 SSTL(Surrey Satellite Technology Limited)이다. 아스트리움은 애초 프랑스와 독일의 합작 회사인 유럽 우주항공 방위산업회(EADS)의 자회사로 영국에 설립됐다. 이 회사는 영국에서 유일하게 대형 상업 위성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반면 SSTL은 서레이대학 위성 연구진이 분사(spin-off) 형식으로 설립한 회사로, 지난 25년간 소형 위성 제조 분야에만 매진해 왔다. 이들 두 회사가 민간 분야에서 쌍두마차처럼 영국의 우주항공 산업을 이끌어 오고 있다.
최근 영국 우주항공 업체들이 집중 공략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분야는 대형 상업 위성보다 중소형 규모의 실용 위성에 집중되고 있다. 위성 통신이나 항법 위성, 그중에서도 개도국 경제 규모에 맞는 중소형 위성을 필요로 하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수출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일종의 틈새시장 전략이다.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서 후발 주자에 불과한 영국이 뒤늦게나마 유럽 내 경쟁자들을 따라잡거나 대등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으리라고 보는 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기후변화 이슈에 대응하거나 테러 위험 국가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는 등 새로운 안보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위성 개발 및 운용 사업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기후변화는 물론 대테러 공조라는 국제정치 환경에서도 여전히 지도적 위치를 굳히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민간 기업들의 위성사진 제공 서비스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둘째, 일반 광대역 통신망이나 무선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한 지역에 통신위성을 이용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래형 우주산업에서 영국의 역할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활성화되고 유비쿼터스적 모바일 인터넷 환경이 요구되면서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서도 위성 기반 인터넷 사업은 블루 오션으로 꼽힌다. 이 역시 영국 정부가 차세대 인터넷 사업의 역점 목표로 삼고 있는 부분이다.
셋째, 위성 인터넷 사업은 국제사회에서 영국 정부가 지도력을 발휘해 온 탄소 절감형 경제 건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위성 인터넷이 활성화되면 이를 통해서만 1년에 4000만 톤이나 되는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통계도 있다.
기후변화에서 테러 감시까지 … 수요 급증
이 밖에 첨단 기상 및 통신위성을 지구 궤도에 띄워 놓고 활용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바닷물의 색상을 촬영해 적조 등 환경오염 정도를 측정할 수 있고 수목이나 농작물의 색상을 보고 병충해 여부까지도 분별할 수 있다. 대규모 자연재해 감시는 물론 중·장기적 환경 변화를 추적하고 예측하는 데도 기상 및 통신 위성의 활용은 필수적이다.
유럽 각국이 이러한 기상 및 환경 정보 수집과 공유를 위한 환경 안보 글로벌 모니터링 프로그램(GMES)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지금까지 이러한 국가 간 협력 프로그램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은 참여도를 보여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 내 위성통신 분야 사업자들 역시 여전히 정부 차원의 정책적 투자가 부족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영국은 우주항공 산업에 관한 정부 투자 금액 면에서 21위에 머물러 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유럽 내 경쟁 국가들이 모두 10위권 안에 진입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파리에 본부를 둔 유로컨설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주항공 산업 분야에 대한 세계 각국의 투자액 중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1.4%에 불과하다. 유럽 국가들의 우주항공 산업 투자는 대부분 유럽항공국(ESA)을 통해 이뤄진다.
ESA에 참여한 나라들의 출자 비율에 따라 유럽 차원의 프로젝트가 개별 국가에 할당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이후 영국은 ESA를 통한 적극적 투자에서 늘 한 발 뺀 채로 있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경쟁국들은 대부분 영국보다 두세 배 이상 투자하고 있다.
사실 우주항공 산업에 대한 영국 정부의 상대적 무관심은 대처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유인 우주선 사업 참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정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정책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5년 뒤 재탄생한 보수당 정부는 우주과학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리겠다고 선언하며 과거 보수당 정부의 정책 노선을 전면 수정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우주항공 분야에 다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영국 정부의 계획이 목표한 시일 내에 얼마나 큰 결실을 거둘지는 아직 불확실해 보인다. 브라질·중국·인도 등 신흥 개발국들이 정부 주도로 이 분야에 집중 육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영국으로부터 위성기술을 배워왔던 한국 역시 영국의 경쟁 상대에 올라 있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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