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정의로운 행동과 태도를 딸에게 요구한다. 딸에게 그런 훈계를 할 때마다 나를 지켜보는 아버지를 만난다. 내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한마디로 실망 시켜드리기 싫은 존재인 것 같다. 왜 그런 존재가 되셨을까.

그 시대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아버지는 한마디로 무뚝뚝하셨다.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특별한 말씀을 한 적이 없는 것도 같다. 삼형제의 둘째로 태어나 아버지와 단둘이 시간을 갖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와의 둘만의 나들이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중학교 때 아버지와 함께 증조할아버지 산소의 벌초를 하려고 꽤 높은 산을 올라간 적이 있다. 새벽에 출발해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첫 산소에 도착했고, 또 산을 넘어 두 번째 산소의 벌초를 하고, 또 다른 산에 올라 벌초를 했다.

아버지는 주말에 친구들과 놀아야 하는데 괜히 따라왔다고 투덜거리는 나를 가끔씩 쳐다보면서 묵묵히 벌초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벌초를 하는 동안 풀과 돌을 발로 차면서 투덜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 나의 아버지] 월미도 꽃게찜의 추억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면 하루 종일 투덜거렸다고 야단치거나 다음에는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실 것 같았다. 그런데 집에 와서 어머니께 하시는 말씀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리고 약해서 산행을 못 따라 다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주 잘 따라다녔다고 칭찬해 줬다. 그리고 그 후 벌초 때가 되면 그때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늘 칭찬해 주셨다.

대학 졸업 후 1년 가까이 고향에서 ‘백수’로 뒹굴다가 먼저 직장 생활을 하던 친구의 추천으로 운 좋게 취직했고 서울에 올라왔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겠다며 서울로 올라 오셨다.

첫 월급으로 구입한 작은 중고차를 타고 아버지와 오랜 만에 둘 만의 나들이를 했다. 대접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자주 접하지 못한 음식을 찾아 인천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월미도 입구에 있는 꽤 큰 게 요리점에 들어갔다. 큰 대게가 있고 좀 작은 꽃게가 있다고 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는 대게를 주문할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꽃게찜을 주문했다. 게는 너무 오래됐는지 질기기까지 했다. 먹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는데다 손가락에는 비린내만 남았다. 비린내가 손에 배어 아버지와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손을 씻어야 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서 먼 곳까지 찾아갔는데 싼 음식을 주문해 괜한 고생만 시켜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그런 마음에 시무룩하게 있던 내게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웃으면서 쳐다보기만 했다. 그날 이후로 게 요리만 보면 월미도 식당에서 꽃게 먹고 비린내로 고생했던 이야기를 했다. 둘째 아들에게 대접 받은 첫 번째 식사로, 흐뭇한 추억으로 재미있게 말씀하셨다.

몇 년 전 일본 싸이월드를 시작하던 즈음에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몇 가지 문제로 일본 사업을 그만두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상을 치르면서 생각을 바꿨다. 아버지는 싸이월드 사업을 하는 아들을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내게도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자고 있는 딸아이를 내려다본다. 그러면 먼 옛날 잠든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시선이 떠오른다. 자고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느껴진다.

나는 매일 딸에게 ‘이렇게 행동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며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정의로운 행동과 태도를 딸에게 요구한다. 딸에게 그런 훈계를 할 때마다 나를 지켜보는 아버지를 만난다. 그런 존재가 내게 있다는 것은 늘 삶을 바르게 지탱하는 힘이 된다.
[아! 나의 아버지] 월미도 꽃게찜의 추억
이동형 나우프로필 대표

커뮤니티 사이트 싸이월드를 창업했다. 싸이월드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SK커뮤니케이션 상무, 일본싸이월드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약속 관리 전용 서비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인 런파파로 유명한 나우프로필을 창업, 대표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