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부품 기업 크루셜텍의 반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해마다 열리는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는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모바일)·정보통신 관련 전시 콘퍼런스다. 지난 2월 14일부터 4일간 열린 ‘MWC 2011’에도 전 세계에서 1300여 개의 이동통신 관련 기업이 참여했다.

MWC는 글로벌 210여 개국의 휴대전화 제조사 및 장비 업체 연합체인 GSMA(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 Association :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가 주최하는 행사다. 세계 최대 규모이고 이 시각 현재 모바일 산업의 첨단 기술과 장비는 물론 앞으로의 트렌드까지 엿볼 수 있는 것 역시 MWC를 통해서 가능하다.

세계적으로 난다 긴다 하는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참가하는 이 행사에서는 한 해 동안 시장에 나왔던 휴대전화 중 ‘최고의 휴대전화’를 선정하고 이와 별도로 ‘최고의 휴대전화 제조사’도 선정한다.

지난 2월 열린 행사에서 최고의 휴대전화에 선정된 단말기는 예상하다시피 애플의 ‘아이폰4’였다. 그렇다면 최고의 제조사는 어디였을까. 눈부신 성장세로 휴대전화 제조 기업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삼성이나 LG였다면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예의 수상자는 대만의 휴대전화 제조사인 HTC에 돌아갔다. 내심 수상을 기대했던 국내 기업들의 실망이 컸다는 후문이다. HTC는 국내에선 애플이나 삼성의 기세에 눌려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휴대전화, 특히 스마트폰에서 한해서는 상당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다.

2010년 4분기 기준으로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HTC는 노키아·애플·RIM·삼성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LG와 모토로라를 멀찌감치 따돌린 것.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미국 시장에서는 삼성이 7%의 시장점유율을 보인데 비해 HTC는 17%를 기록해 10%포인트나 앞서가고 있다.
[비즈니스 포커스] OTP 최초 개발…기술력으로 글로벌 장악
글로벌 휴대전화 제조사와 협력 관계

HTC의 선전과 함께 주목받는 국내 기업이 있다. 글로벌 부품 공급처의 다변화로 애플의 호실적이 삼성전자의 실적으로 이어지는 사례와 비슷한 경우다. 주인공은 휴대전화 부품 공급 업체 ‘크루셜텍’이다.

HTC가 생산한 스마트폰에는 어김없이 ‘광학 마우스’가 달려 있다. 전문 용어로 ‘옵티컬 트랙패드(OTP : Optical TrackPad)’라고 부르는 이 장치는 휴대기기에 장착된 패드에서 나오는 빛이 사용자의 손가락 이미지를 인식해 PC의 마우스처럼 커서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와 솔루션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손가락을 트랙볼에 대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스마트폰 화면 안의 마우스가 작동하고 볼을 누르는 동작이 마우스 클릭과 똑같이 작동하는 이치다.

PC 화면보다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는 스마트폰의 UI(User Interface : 사용자 환경)는 입력 오류가 잘 나는 편이다. 특히 손가락의 터치로 작동하는 이상 원하지 않는 영역까지 터치하게 돼 불필요한 입력 오류를 겪은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정도다. 이럴 때 미세한 움직임으로 원하는 링크를 정확히 짚어내는 OTP의 쓰임새는 앞으로도 더욱 확대되고 각광받을 것이 분명하다.

크루셜텍이 만들어낸 OTP는 HTC 스마트폰 외에 RIM의 ‘블랙베리’폰에도 기본 장착돼 있다. 블랙베리 역시 국내에선 일부 얼리어답터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RIM은 올 초만 해도 2011년 제품 출하량을 5500만 대로 보고 보수적인 출하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중국·인도·인도네시아 등 신흥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출하량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연간 8000만 대에서 최대 1억 대까지도 출하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크루셜텍이 OTP를 공급하는 협력사 중 RIM은 매출의 64%를, HTC는 27%를 차지하고 있다(2010년 기준). 90% 이상을 차지하는 양사의 출하량 급증이 고스란히 크루셜텍의 매출 성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크루셜텍은 지난 2001년 설립된 회사로 OTP를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7년 매출액 52억 원에 영업이익률 마이너스 17.3%를 기록했던 그저 그런 IT 벤처기업은 2008년 매출액 425억 원, 2009년 622억 원에 이어 작년에는 2081억 원을 올렸다. 2009년 실적에 비해 234.8%나 성장한 경이적인 기록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올해 매출액은 3570억 원, 영업이익은 457억 원을 예상하고 있다.
[비즈니스 포커스] OTP 최초 개발…기술력으로 글로벌 장악
2010년 매출액 234% 성장

크루셜텍이 생산하는 OTP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세계 OTP 시장의 성장세나 점유율은 곧 크루셜텍의 실적과 같다. 세계적으로 OTP 관련 기술을 보유해 이를 상용화한 기업이 크루셜텍이기 때문이다. 즉 전 세계 OTP 독점 생산 기업이 국내 기업인 크루셜텍뿐이라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OTP는 휴대전화 입력장치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능과 기능을 지닌 부품으로 꼽힌다. 휴대전화 부품 중 최고 수준의 성장률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되는 부품 역시 OTP다. 크루셜텍은 최근 RIM과 HTC 외에도 부품 공급처 다변화 전략에 나섰다.

대표적인 곳이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작년 한 해 크루셜텍의 매출 비중 중 5%를 차지해 주요 고객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OTP가 채용된 일부 피처폰이 동남아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최근에는 월 150만 대 이상의 출하량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크루셜텍의 OTP 매출에서만 삼성전자가 15% 내외를 차지할 전망이다.

세계 최대 휴대전화 제조사인 노키아와의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도 있다. 크루셜텍과 노키아는 이미 2년 이상 OTP에 대한 품질 인증과 납품 협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늦어도 올 3분기 안에는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품질 인증과 단독 라인 요구 등 대부분의 이슈가 해결된 이상 단가 협상만 잘 마무리된다면 노키아 부품 공급으로 또 한 번 크루셜텍의 비상이 점쳐진다.

OTP는 휴대전화뿐만 아니라 스마트 TV의 리모컨에도 적용할 수 있다. 경쟁 기술인 자이로나 터치 방식에 비해 10분의 1(10달러 이하)에 불과한 가격 경쟁력도 OTP만의 강점이다. 크루셜텍은 2010년 말부터 LG유플러스의 리모컨에 부품을 납품해 오고 있으며 SK브로드밴드와도 부품 공급을 협의 중이다.

OTP 외에도 크루셜텍이 생산하는 ‘HiPol(High Power LED)’도 신규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다. HiPol 역시 크루셜텍이 독자 개발한 부품으로, 휴대전화 카메라용 플래시 모듈이다. 사실 HiPol은 OTP보다 먼저 개발됐지만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아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애플이 아이폰4에 발광다이오드(LED) 플래시를 채용하면서 다시 대세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다.

아이폰4의 LED 플래시는 단순히 칩 하나를 추가한 것에 불과하지만 HiPol 모듈은 기존 부품 대비 빛 효율이 4배 이상 밝고 발열량은 10% 정도 감소하는 장점이 있다. 삼성전자 등 하이엔드급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독점이 지속되면 경쟁사 출현에 따른 성장 둔화와 수익성 악화가 예상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당분간 크루셜텍의 독점 구도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우선 수율과 마진 등 기업이 가진 경쟁력을 후발 업체가 따라잡기 힘들다는 예상이다. 여기에 세계 최초의 OTP 개발사답게 관련 지식재산권만 170여 개에 이른다. 향후 등장할 경쟁사 견제에 유용한 도구로 쓰일 것은 자명하다.

OTP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센서를 공급하는 곳은 미국의 아바고(Avago)다. 크루셜텍은 아바고와 독점 공급 계약해 센서를 받고 있다.

아바고는 광마우스용 센서 글로벌 1위 기업으로 시가총액이 80만 달러가 넘는 대형 반도체 기업이다. 연간 1억 개 이상의 판매가 예상되는 크루셜텍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아바고가 모험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크루셜텍이 갖는 기업 외적 경쟁력이다.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