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왜 은행나무도 파셨을까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부모 때부터 사셨던 시골집의 일부를 파신다는 것이다. 그곳은 어린 시절 추억이 흠뻑 담긴 곳이고 어릴 때 부모님은 물론이고 나 역시 한동안 살기도 했던 곳이다.

어려운 결정이라고 미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가족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했으니 그리 알라고만 하셨다. 수화기 너머에는 마음 여린 어머니의 울먹이는 푸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그 시골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 시대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어머니도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기일만 되면 시골집에서 한탄과 넋두리를 늘어놓곤 하셨는데, 그래도 그 집의 일부를 판다고 하니 많이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처럼 어려운 의사결정을 대부분 혼자 하신다. 같이 고민해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 시골 집 한가운데에는 둘레가 무려 7m나 되는 노거수가 있다. 은행나무다. 암컷 나무라서 열매가 많이 열렸을 때는 10여 가마니나 수확할 정도였다. 아마도 전라북도에서 제일 큰 나무일 것이고, 전국에서도 몇 안 되는 거목일 것이다.

그래서 노소간에 우리 시골집을 은행나무집으로 불렀다. 그 은행나무에 담긴 우리 식구의 추억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나무도 파셨다. 쉽게 팔리기 어려운 시골 땅이기에 팔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같은 어려운 결정을 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안채는 팔지 않았기 때문에 어차피 은행나무의 그늘과 풍모는 계속 즐길 수 있겠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은행나무가 너무 아쉽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이지만 결정은 이처럼 항상 단호하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매우 다양한 인생을 살아 오셨다. 직업을 4번 바꾸셨는데, 도청 공무원으로, 중학교 교사로, 사업가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셨다. 아버지는 남 앞에 본인의 자랑을 좀처럼 늘어놓지 않는 분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스스로 당신의 자랑을 늘어놓은 적이 세 번 있었다. 중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고등학교 진학반 담임을 맡으셨을 때 평준화 이전의 지역 명문고에 한 반에서만 50명 넘게 보내셨을 때다.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신 지 1~2년 정도 되었을 무렵, 기분 좋게 취해 귀가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도내 동종 업체 중 매출 순위 3위를 만드셨다고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는 지방 정치에 뛰어드셔서 성공한 경험이다.

아버지의 성공은 매사에 신중한 성격, 단호한 의사결정과 도전 정신,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집념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내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 흡사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만한 아들 없다고,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나의 애널리스트 생활을 회고해 보면 그런 아버지의 철학과 신념을 알게 모르게 많이 답습했던 것 같다.

목표를 향한 집념과 고집이 없었다면, 소위 말하는 시장에서 인정받는 베스트 애널리스트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10여 년 전, 투자 실패로 거의 집 한 채 값을 날린 적이 있다. 직장 생활을 통해 그때까지 저축한 돈과 아버지한테 빌린 돈이었는데, 친구 회사에 투자했다가 모두 잃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나한테 돈을 빌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에서 서너 번의 극적인 기회가 오는데, 이번이 그 기회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해라.” 내가 투자한 돈은 결국 휴지 조각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나에게 핀잔을 주시지 않았다.

나도 돌이켜보면 도전적 의사결정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항상 아버지에게 수용됐다. 내가 받은 최대의 공부, 바로 아버지가 주신 큰 유산이다. 부디 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시길 바란다.

[아! 나의 아버지] 왜 은행나무도 파셨을까
이준재 한국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1992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94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MBA를 마쳤다. 94년 LG증권에서 애널리스트 생활을 시작해 대우증권을 거쳐 한국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