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회를 풍요롭게 할 3가지

“젊음이여, 너와는 이제 이별이런가/ 단 하루라도, 아름다운 사람이/ 따뜻한 마음에 모든 것을 잊고/ 내 품 속에서 전율할 수 있다면 몰라도,” 평생 일기를 쓴 앙리 아미엘의 일기를 들춰보다 이 시가 눈에 들어온다. 한 해가 또 가서인가, 아니면 젊음과 이제는 영영 이별할 나이 때문인가.

또 한 해를 보내는 탓일까. 대뜸 ‘가장 풍요로운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생각해 본다. 그건 바로 역할 모델이 많은 사회가 아닐는지. 누구나 한번쯤 느껴본 적이 있을 테지만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닮고 싶은 역할 모델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개인의 불행이자 사회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올해 역할 모델을 한 명 더 추가할 수 있었다. 바로 ‘한서’를 쓴 반고(班固)인데 그의 문체에 매료됐다. 흔히 작가의 생명은 ‘문체’에 있다고 한다. 문체는 사람으로 치면 고유의 인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은 단순히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인데, 이게 문체인 셈이다.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을 때 ‘상승 에너지’를 느낀다면 그게 바로 그 작가의 문체와 궁합이 맞는다는 것일 게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2일 오전부터 본격적인 귀성길이 시작됐다. 한국도로공사 서울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차량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20100212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2일 오전부터 본격적인 귀성길이 시작됐다. 한국도로공사 서울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차량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20100212
궁합이 맞는 책은 에너지가 된다

조선 중기 김득신은 이를 책의 기운이라고 표현했다. “한유는 ‘몸통이 갖춰지지 않으면 성인(成人)이 될 수가 없듯이, 기가 충족되지 않으면 성문(成文)이 될 수 없다’고 했으니, 문장이 잘 지어지고 잘 지어지지 못하는 것은 ‘기가 온전하냐, 온전하지 못하냐’의 여하에 있는 것이다.” 김득신은 “요컨대 양기는 학문과 자기 수양의 바탕 위에서 길러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보신탕이나 보약을 먹어야 양기에 좋다고 생각하는데, 김득신은 학문과 자기 수양에서 양기를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양기는 자신과 궁합이 맞는 문체의 책을 읽을 때 생긴다며, 이를 ‘성기(聲氣)’라고 김득신은 주장한다. “기는 작가의 생명력을 거쳐 나온 정성(情性)이며 동시에 문장 속에 들어가 문체로 구현된 것이다.”

성기는 소리의 기세를 말한다. 수양의 바탕을 이룬 사람은 외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온화한 모습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바로 책을 읽으면서 얻는 성기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김득신은 “성기의 체득은 인성구기(因聲求氣)를 통해 이뤄지며 인성구기의 목표는 결국 양기인 것이다.

고인(古人)의 글을 자기화할 때 성기의 체득은 주요 관건이 된다”고 말한다. 개인의 성정이 작가의 문체와 잘 어울려야 양기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책을 읽다가 왠지 짜증이 나고 답답해진다면 성기가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박경리의 작품은 가슴 속에 푹 젖어드는데 비해 박○○의 작품은 도무지 읽혀지지가 않았다. 신△△의 소설은 사 놓고 몇 줄 읽다가 그만뒀다. 또한 느낌표를 남발하는 글이나 현학적인 단어를 남발하는 책들을 읽을 때면 짜증이 났다. 김득신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게 바로 성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작가의 문체와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이다.

김득신이 양기를 얻고 시인의 자질을 연마한 글들은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와 한유·유종원의 글들이었다고 한다. “나는 천성이 노둔하여 ‘사기’, ‘한서’ 및 한유와 유종원의 글을 베껴 만 번이나 읽었는데 그 가운데 백이전은 1억1만8000번을 읽고 드디어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고 하였다.”

김득신은 1만 번 이상 읽은 책이 36편이나 된다며 이른바 ‘독수기’를 적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한유였는데 1만 번 이상 읽은 36편 가운데 한유의 책이 20편으로 가장 많았고 사마천·유종원·소식·유향·소순 등의 순이었다.

연암 박지원도 자신이 글을 쓸 때 “나의 문장은 좌구명과 공양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사마천과 반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한유와 유종원을 따른 것이 있으며, 김성탄과 원굉도를 따른 것이 있다”고 했다. 장차 작가나 글쓰기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면 새겨들을 경험칙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김득신의 삶을 접하면서 무엇보다 ‘끈기’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산림을 택한 선비는 한번 조정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조정의 선비는 한 번 조정에 들어오면 다시는 나가지 못한다. 양편은 각각 단점이 있다. 그러나 조정에 집착한 선비들은 대개 죄를 얻어 몰락한 자들이 많기 때문에 깨끗하게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 높이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자들은 대체로 ‘자신을 잘 다스리지만 남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고 보았다.” 반고의 지적처럼 장점은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되는 게 세상의 이치다. 글을 잘하는 이는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잘하는 이는 글을 잘 못한다.

글을 잘 쓰는 장점이 말을 못하는 단점이 되고, 말을 잘하는 장점이 글을 못하는 단점이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장점을 가진 이는 드물다. 그래서 세상은 길게 보면 공평하다고 한다.

‘한서’에는 촉 땅의 엄군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촉 땅에 엄군평이라는 사람은 몸을 수양하고 지조를 지켰다. 엄군평은 성도에서 점을 치며 살았는데 그의 신념은 이러했다.

“점쟁이는 비천한 직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 사악하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물어오는 자가 있으면 시초점과 거북점을 이용해 그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말해준다. 아들에게 점을 쳐줄 때에는 효도를 말해주고, 자제에게 점을 쳐줄 때에는 순종하는 도리를 말해주며, 신하에게 점을 쳐줄 때에는 충성을 말해준다. 각각의 경우마다 사람이 처한 형편에 따라 선행으로 이끌면 된다.”

엄군평은 날마다 몇 사람에게 점을 쳐 주고 그에게 필요한 비용인 백전(百錢)을 얻기만 하면 상점의 문을 닫고 발을 내려닫은 채 학생들에게 ‘노자’를 가르쳤다. 그는 책을 널리 보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에 의거해 10만여 글자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엄군평은 그야말로 욕망을 절제하며 지혜롭게 살다 간 인물인 셈이다. 필자는 엄군평의 삶에 매료돼 닮고 싶은 역할 모델로 이내 추가해 두었다.

미켈란젤로의 코뼈가 내려앉은 이유는

올해 읽은 글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미켈란젤로의 코뼈가 내려앉은 사연에 대한 글이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장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옆에 있던 토레지아니라는 동료 화가의 그림에 대해 혹평했다. 토레지아니 역시 미켈란젤로처럼 입이 거칠고 시샘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만 싸움이 붙었다. 이내 미켈란젤로가 나가떨어졌는데 그만 코뼈가 내려앉고 말았다.

촉망받았던 토레지아니는 그 후 피렌체를 떠나야 했고 결국 유랑 생활을 하다가 화가로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쉰여섯 살에 객사하고 말았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코뼈가 내려앉았지만 아흔 살 넘게 살면서 메디치가 최고의 장학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둘 다 주먹을 휘둘렀지만 악의에 찬 주먹을 휘둘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것이다. 토레지아니는 미켈란젤로에게 악의에 찬 주먹을 날렸고 그 응보를 받은 것이다.

이 글은 한 신문에서 읽은 성석제의 칼럼과 묘하게 오버랩됐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내 차 앞으로 끼어든다. 예상할 수 없던 상황이어서 나는 몹시 놀란다…. 검은색 승용차는 난폭하게 규칙을 어기고 나를 추월한 뒤 추월선의 승합차 앞에 점멸 신호조차 없이 끼어들어서 규정 속도를 위반해 달아나고 있다. …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줘? 내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추월선에서 주행을 계속하던 승합차 역시 운전이 거칠어지는 것 같다. 앞의 앞 차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자극받고 영향을 받는다. 도로 전체의 위험도가 높아진다.”

성석제는 이 운전자에게 ‘염치’를 가르쳐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썼다. 운전을 하다 보면 ‘몰염치 운전자’들이 너무 많다. 이런 운전자에게는 마음 같아서는 토레지아니처럼 당장 주먹을 날리고 싶다. 이런 무법자는 틀림없이 닮고 싶은 역할 모델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고급 차를 가졌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것이다.

다만, 이 해가 가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성석제 칼럼의 운전자처럼 주위를 배려하지 않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혹은 토레지아니처럼 상대의 능력을 질시하면서 비난하거나 해코지하려는 마음이라도 가진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문체를 가졌는지.
[최효찬의 문사철(文史哲) 콘서트] ‘좋은 책·역할모델·염치’를 가졌는가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