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제로금리 시대 일본인의 재테크

저성장·고령화에 일본 경제가 울상이다. 일본 가계도 마찬가지다. 제로금리·노후 대비로 적자 인생을 염려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방법은 근로·자산 소득을 늘리는 것인데, 문제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재테크의 희박해진 존재감이다. 그래도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포기하기는 이르다. 실제 물밑에선 다양한 자산 증식 노력도 목격된다. 실질적인 제로금리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일본인들의 재테크 실태를 소개한다.
[창간 15주년 기획특집 3] 노후 대비용 장기 투자 ‘선호’
재테크는 재(財)란 한자와 테크닉(Technique)이란 영어의 합성어다. 원조국은 일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 기업의 흑자 창출 비법(?)을 언론이 ‘재테크’로 명명한 게 유래다. 1985년 엔화 절상(플라자 합의)은 일본 재계에 되레 득이 됐다.

수출이 어려워지자 아시아 진출로 해결하고 엔고로 수입 원가가 줄어들자 가격 경쟁력이 더 높아졌다. 정부는 건설 경기에 목돈을 투하했고 돈줄마저 초저금리로 풀어놓았다. 초대형 경기의 서막이었다.

재테크는 이때 등장했다. 가계보다 기업이 주체였다. 당시 재계는 본업보다 돈놀이에 열중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인플레 덕에 욕망이 부풀어갔다. 부동산에서부터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재테크는 끝내 투기로까지 연결됐다. 뒤이어 일반 가계까지 가세하며 버블 축제는 절정을 맞았다.

그로부터 20여 년. 재테크란 단어는 확실히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재테크란 단어 자체를 모르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재테크 여부를 물으면 십중팔구 하지 않거나 못한다고 대답했다. 언제부터인가 주요 언론도 재테크란 글자를 피한다.

기사를 검색해 보면 관련 기사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일본 가계가 재테크와 결별한 건 아니다. 자산운용·증식 등의 단어로 변했을 뿐 여전히 존재한다. 잔존 여명이 길어지고 불황 바닥이 깊어갈수록 돈을 불리려는 필요성은 오히려 더 증가했다.

물론 포기 그룹도 많다. 종잣돈이 없는데다 투자 환경도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대단한 2030세대가 대표적이다. 2008년 때처럼 금융 위기라도 닥치면 그나마 되살아난 운용 욕구조차 사라지기 일쑤다.

그래도 당위론만큼은 건재하다. 돈 없는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무연(無緣)사회의 고독사(孤獨死)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2010년 일본인의 재테크는 높아진 필요와 줄어든 희망으로 요약된다.
[창간 15주년 기획특집 3] 노후 대비용 장기 투자 ‘선호’
투자 환경과 운용 특징

일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부자 나라, 빈곤 국민’이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평균치로 보면 일본 가계는 엄연히 부자다. 2005년 기준 일본 가계 순자산은 2166조 엔에 달한다. 금융자산(1549조 엔)과 실물자산(998조 엔) 합계에서 부채(381조 엔)를 뺀 금액이다.

현금화가 힘든 실물자산을 빼도 순자산이 1000조 엔 이상이다. 상당한 부(富)다. 그나마 금융 위기를 거치며 줄어든 수치다. 가계 금융자산은 5년 전보다 100조 엔 준 1445조 엔까지 떨어졌다(2010년 6월). 그래도 엄청난 거액은 분명하다.

사실 이 정도면 자산을 증식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뜯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계층·직업별 자산 편중이 커 중산층 이하 상당수 가계가 빈곤 현실에 직면해 있다. 가령 젊은 비정규직의 통장 잔액은 암울할 지경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그룹도 상황은 비슷하다. 장수 위험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자산을 늘려둬야 할 판이다. 돈 많은 정년 세대가 자산 운용에 적극적이고, 또 일본 내수가 쪼그라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유의 안전 지향… ‘리스크는 싫어’
[창간 15주년 기획특집 3] 노후 대비용 장기 투자 ‘선호’
일본 가계의 자산 운용은 한마디로 안전 지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산 비중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금융자산(1445조 엔) 중 56%가 현·예금(806조 엔)에 집중된 상태다(2010년 6월). 이 밖에 보험·연금(393조 엔)과 주식(95조 엔), 주식 이외(91조 엔)로 구성된다.

안전 자산으로 분류되는 보험·연금까지 합하면 전체 자산의 83%(1199조 엔)가 원금 보전 형태로 운용된다는 결론이다. 장기 추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도별로 약간씩 변화가 없지는 않지만 최소 절반 이상인 현·예금 등 안전 자산이 일본 가계의 주력 상품으로 정착됐다.

금융상품의 선택 기준도 1순위는 안전성(44.9%)이다(2009년 금융광보중앙위 의식조사). 유동성(31.0%)과 수익성(16.6%)은 우선 대상에서 밀렸는데 이는 운용 목적이 질병·재해 대비(69.3%)와 노후 대비(61.6%)가 압도적이란 점에서 그만큼 원금 보전 욕구가 반영된 결과로 이해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투자 권유를 둘러싼 금융회사와의 갈등 경험도 89.1%가 없다고 답했다(2008년 의식조사).

국제 조사 결과 일본 가계의 보수 경향은 한층 두드러진다. 한미일 3국의 가계 금융자산을 비교한 결과를 보자(금융투자협회). 한국·일본은 현금·예금 비중이 가장 높은 반면 미국은 주식·채권·펀드 등의 투자 비중이 제일 높았다.

일본 가계의 금융상품 투자 목적은 배당·이자소득(54.1%)이 많은 가운데 장기 운용 성과(50.0%)와 노후 자금 마련(34.7%)이 중요한 이유였다. 이 밖에 주주 우대 기대(19.9%), 자녀 미래 준비(12.3%), 단기 차익(11%), 증권 공부(8.9%), 기업 응원 차원(8.6%) 등도 있다.

장기 투자 성향은 일본이 가장 높다. 1년 이상 보유 비중이 전체의 87.5%를 차지했는데 보유 기간 10년 이상 비율도 30.3%에 달했다. 보유 기간이 평균 1~3개월이라고 답한 한국(32.6%)에 비하면 장기 투자 문화가 정착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 가계를 둘러싼 투자 환경은 요컨대 절망적이다. 투자 활동의 기준 잣대는 시중금리다. 일본의 시중금리는 사실상 제로 상태다. 경기 부양을 원해도 금리가 바닥 수준이니 돈을 더 풀 수밖에 없을 정도다(양적 완화).

1991년 6%대까지 치솟은 시중금리는 이제 0.1%까지 떨어졌다. 초저금리·제로 금리 시대의 안착이다. 이로써 은행 예·적금은 자산운용 범주를 벗어났다. 불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고위험·고수익의 위험자산 편입 비중 확대다.

주식·펀드 등의 활용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봤듯이 투자 자산의 선택 기준은 안전성이 최우선이다. 증권·운용사가 저금리를 내세워 자금 유치에 사활을 걸어도 은행·우체국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없는 근본 이유다.
[창간 15주년 기획특집 3] 노후 대비용 장기 투자 ‘선호’
절약도 재테크…‘불리기보다 줄이기’

신한재팬이 고정금리 1.6%(3년 만기 정기예금)를 내걸자 일본 고객이 물밀듯이 몰려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기대 수익이 낮다. 재테크 잡지가 기대 수익 3~4%대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소개할 정도다. 다만 일부 가계는 해외 주식·채권을 비롯한 외환거래 등 위험자산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는다. 난국 타개를 위한 위험 수용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돈을 쥐는 방법은 둘뿐이다. 더 벌거나 덜 쓰거나(수익 증대, 지출 감소)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가계의 돈줄은 급격히 축소됐다. 근로소득·자산소득도 매한가지다. 일시적 경기 회복 때조차 기업 금고는 부풀어도 가계 지갑은 정반대다. 일례로 샐러리맨의 평균 급여는 1997년 467만3000엔에서 2009년엔 405만9000엔으로 감소했다(민간 급여 실태 조사).

전체 근로자의 35%에 달하는 비정규직 증가와 제조 현장의 해외 이전, 고용 없는 성장 등 가계소득 감소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대응 결과는 하나로 압축된다. 허리띠 졸라매기다. 절약 생활은 중산층을 포함한 절대 다수 일본 가계의 생존전략 중 하나다.

불리기 힘드니 줄이자는 결과다. 유니클로의 저가 공세나 500엔 동전 한 닢으로 민생고를 해결하는 원코인(One Coin) 마케팅이 활황인 이유다. 긴켄(金券)으로 불리는 각종 할인 티켓·적립카드·우대권 등으로 생활비를 아끼려는 가계도 증가세다. 적게는 2~3%에서 많게는 최대 10% 이상 절감 효과가 기대돼 인기가 높다. 절약에 지쳐 약간의 사치로 돌아선 수요도 있지만 대세는 마른 수건 쥐어짜기다.

연령에 비례해 투자 성향은 보수·안정적이게 마련이다. 다만 이 가설도 일본 가계라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정년 이후(65세 이상) 평균적인 일본 노인은 자산운용에 적극적이다. 은퇴 이후 수입은 줄어드는데 지출이 늘어나서다. 그만큼 노후 불안감이 높다.

실제 고령 무직 세대는 증가세인 반면 사회보장 지출 증가와 연금 불안은 나날이 심화되는 추세다. 고령 세대의 예비적 동기에 의한 저축이 필요한 이유다. 이때 단순한 저축만으론 기대 수익을 맞출 수 없다. 결국 위험자산 선택 압박이 높아진 셈이다.

게다가 일본 노인은 대부분 부자다. 가계 금융자산의 60%를 65세 이상이 보유 중이다. 고령자 개별 세대 평균 자산도 5679만 엔에 달한다(2004년). 생활비로는 모자라도 평균(고령 부부, 무직 세대) 연금 수입도 월 21만 엔으로 안정적이다.

문제는 장수 위험으로 평균수명(83세)이 길어질수록 보유 자산을 헐어 사용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위험자산에 대한 선호 증대는 이런 상황 배경에서 비롯된다. 실제 보유 금융자산에 대한 위험자산(주식·채권 합계) 비율은 30대가 10%인 반면 60대는 17%에 달한다(내각부). 최근 증가 중인 고위험의 신흥국 투자 자산(통화·주식 등) 편입 고객 중 상당수가 정년 이후의 고령 고객으로 알려졌다.

성공 재테크는 속도·크기의 함수 풀이에 달렸다. 종잣돈이 많고 일찍 시작할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장기 투자가 추천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다만 일본의 청년 세대에겐 재테크를 시작할 돈도 의지도 거의 없다. 사실상 그림의 떡이다. 생활수준 상중하 계층 기준 1 대 2 대 7의 하층(7) 상당수가 2030세대인 까닭에서다.

눈앞의 취업조차 힘든 마당에 미래의 노후 대비까지 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바늘구멍의 정규직 취업을 뚫었어도 연공서열 약화로 평균임금은 감소세다. 워킹푸어·니트족·프리터 등 2030세대 취업 난민 중 일부는 ‘취업 실패→절망 증대→의욕 상실’의 악순환에까지 빠졌다.

그나마 4060세대는 낫다. 신졸 당시 고용 환경이 2030세대보다 나은데다 8090세대의 부자 부모로부터 상속 수혜도 기대되기 때문이다. 실제 연령별 금융자산을 보면 20대(294만 엔)와 30대(598만 엔)는 60대(2202만 엔)와 70대(2361만 엔)보다 현격하게 적다(2009년).

그나마 이 통계는 2인 이상 세대로 빈곤층이 많은 단신 세대를 제외한 수치다. 위험자산 선호도도 떨어진다. 주식·펀드의 편입 비율은 젊은 20대(4%)·30대(5%)보다 늙은 60대(8%)·70대(12%)가 더 높다. 20대의 보유 비중은 예금(77%)이 압도적인 가운데 보험(13%)이 그 뒤를 달렸다.

금융 위기 이후 ‘투자에서 저축으로’
[창간 15주년 기획특집 3] 노후 대비용 장기 투자 ‘선호’
유동성 함정은 일본 내수의 골칫덩이다. 윤활유(돈)가 돌지 않는 기계(경제)는 삐걱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고육지책이 ‘저축에서 투자로’의 패러다임 전환 슬로건이다.

노후 준비의 자기 책임을 강조하며 서둘러 적극적인 자산운용에 나설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시작은 2001년 고이즈미 정권 때부터다.

이후 정책 우대도 시작됐다. 2003년부터는 주식·펀드 매각 이익과 배당·분배금 세율을 20%에서 10%로 인하하는 증권 우대 세제를 실시했다.

반면 예·적금 금리 등은 20%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10.1%(2001년 3월)에 머물렀던 위험자산 보유 비율은 이후 17%대(2007년 3말)까지 올랐다. 더욱이 펀드로의 급속한 자금 유입은 2000년대 중반 일본 가계의 작은 붐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축에서 투자로의 슬로건이 깨진 것이다. 금융 위기 이후 가계 자산이 축소되는 가운데 주식·펀드 등 위험자산 보유 비율은 8.9%로 회귀했다. 동시에 폭락 과정에서의 손실 가계도 늘어났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 국민을 선동하듯 저축에서 투자로 내몬데 위화감을 갖는 시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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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일본 가계는 정말 위험을 싫어할까

실제 투자 실탄은 약 500조 엔…가계 금융자산의 1/3 수준


언제부터인가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은 1500조 엔 안팎으로 굳어진 느낌이다. 다만 정확하게는 ‘1500조 엔±50조 엔’으로 보는 게 맞다. 비교적 장기간 이 박스권을 뚫지 못해서다.

먼저 가계 자산 1445조 엔(6월 말)은 금융자산만의 합계 수치다. 엄연히 부동산·자동차 등 실물자산도 있는데 이 부분은 제외됐다. 대략 1000조 엔 안팎이다. 이때 실물자산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부동산은 위험자산에 가깝다.

매수 직후부터 감가상각이 적용될 뿐만 아니라 시황 침체로 플러스알파(시세 차익)도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부동산은 시가 변동인 탓에 시황에 따라 가격이 오락가락하는 위험자산이다. 미국 가계보다 부동산 의존도가 높은 건 물론이다.

동시에 일본 가계 금융자산엔 개인 기업의 주식·출자금도 포함된다. 이는 위험자산에 더 가깝다. 반면 미국 가계의 금융자산에 개인 기업은 포함되지 않는다. 미국 가계가 위험자산을 선호한다는 인식도 오해일 확률이 높다.

상위 5% 거대 부자가 가계의 주식 잔액 전체의 80%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의 환상이란 얘기다. 대부분 일반 가계의 위험자산 보유 비중은 일본보다 높지 않다. 한편 보험·연금준비금은 일본이 안전자산인 확정 급부형이 많은 반면 미국은 리스크 자산의 확정 갹출형이 대부분이다.

평균적인 일본 가계를 부자 그룹으로 보는 인식도 흔들린다. 2010년 6월 기준 금융자산 중 부채를 뺀 순자산은 1076조 엔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45조 엔-369조 엔=1076조 엔). 자산 항목에 포함된 보험·연금준비금(393조 엔)도 금융자산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는 가계가 지불한 보험료와 연금 적립금 중 언젠가 보험금·연금으로 받을 금액으로 금융회사가 적립 중인 책임 준비금이다. 이 때문에 가계가 이를 임의로 헐어 예금과 주식 투자로 활용할 수 있다는 가정은 틀렸다.

이것까지 빼면 가계 금융자산은 683조 엔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기엔 자영업 등 사업 자금도 포함된다. 즉 금융자산 중 예금·현금 항목은 정기성 예금(464조 엔)과 유동성 예금(283조 엔)으로 나뉘는데 유동성 예금 중 상당 부분이 개인 사업자가 보유한 사업 자금일 확률이 높다.

결국 정기성 예금 정도만 일본 가계의 순수한 투자 실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애초 금융자산 1500조 엔 중 3분의 1 정도만 투자 여력이 있다는 의미다.

도쿄(일본)= 전영수 게이오대 경제학부 방문교수 change4dre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