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민’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동시에 국가를 이끄는 리더들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여당인 한나라당 대표는 ‘보온병 포탄’으로 망신살을 자초했다. 야당인 인천 시장은 부적절한 폭탄주 발언으로 신뢰 위기를 자초했다. 오십보백보의 언행이다.

이들은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차제에 ‘병역 미필자’가 국회의원 등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에 입후보해 당선되면 ‘논산훈련소 입소 의무화’를 입법화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국민에게 봉사하려면 논산훈련소에서 받는 신병 훈련 정도는 이행해야 국민들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역 미필 정치인 망신살

군에 무지한 이들 때문에 국민들은 리더에 대한 불신을 넘어 ‘국격(國格)’에 대한 부끄러움마저 느낀다. 이런 저간의 사정에 따라서인지 김해진 특임차관의 외아들이 백령도에서 해병대원으로 복무한다는 뉴스가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리더들이 앞장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격’은 바로 설 수 없다.

“내 아들의 죽음만이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여전히 적과 마주하고 있는 나머지 소대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 제1해병원정군 사령관 존 켈리 중장은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한 아들을 가슴으로 묻으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로 건재하고 있는 배경에는 그래도 가진 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이라는 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한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왕위 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칼레 시에서 일어났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8월부터 프랑스로 쉽게 드나들기 위해 프랑스의 항구도시인 칼레시를 공격해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그 광경을 목격한 프르와사르는 이에 대해 기록한 프르와사르 연대기를 남겼다.

프르와사르의 연대기에는 칼레시를 포위하는 과정과 영국군의 포위망 속에서 약 1년 정도 버텨온 칼레 시민들의 저항 과정이 상세히 서술돼 있다.

연대기에 따르면 칼레시의 시장인 쥐앙 드 뷔안은 오랫동안 영국군에 포위돼 식량이 고갈되자 칼레시민들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영국 왕에게 칼레시를 넘겨주려고 했다. 영국왕 에드워드는 고티에 드 모니 기사에게 그의 뜻을 칼레 시민들에게 전하도록 했다.

칼레 시민들 가운데 가장 명망 있는 여섯 명이 벌거벗은 채 속옷만 걸치고 모자도 쓰지도 않은 채 목에 오랏줄을 감고 칼레시와 요새의 열쇠를 들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면 시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것이 영국왕의 항복 요구 조건이었다.

시장은 시민들을 공회당으로 불러 모아 영국왕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유스타슈 드 생피에르와 주앙 대르, 자켐 드 위상, 피에르 드 위상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시민들이 칼레 시민들의 목숨과 도시를 구하기 위해 영국왕 앞에 나서기를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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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칼레 시민들의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 영국왕의 요구대로 준비된 여섯 명을 성문 밖의 영국군 진영으로 인도했다. 영국왕이 그들의 처형을 명령했다.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영국 왕비가 왕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그들을 사면해 달라고 간청하자 왕이 감동해 여섯 명의 칼레 시민들을 살려주고 그들에게 각각 동전 여섯 닢을 나누어 주며 영국군 진영에서 풀어주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여기에서 ‘칼레의 시민’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것이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하지만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겠다.’ 영국왕의 서슬 퍼런 항복 조건은 달리 표현하면 6명이 자원하지 않으면 칼레 시민 모두를 처형하겠다는 말이었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됐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유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죽음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 뒤로 고위 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 영국왕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 옷을 입은 채 나왔다.

그 ‘상류층 6명’의 희생으로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됐다. 이 일은 부자나 권력자들이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행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칼레 시민들이 긴박한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보여준 정신은 여러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됐다. 먼저 오귀스트 로댕은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칼레시는 1884년에 550년이 지났지만 당시 칼레 시민들이 보여준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상 제작을 로댕에게 의뢰한 것이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조각은 칼레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같은 애국적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에 표현된 여섯 명의 칼레 시민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고민하며 고립된 존재로 부각됐다. 거장 로댕이 형상화한 이 조각상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칼레 시청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이 조각상은 바닷가 한적한 곳에 세워진 채 방치되다시피 했다. 당시 칼레 시민들은 로댕의 상징주의적 제작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위기 때 리더의 희생은 더욱 빛난다

1917년에는 독일 표현주의 작가인 게오르크 카이저가 이 로댕의 조각상에 영감을 얻어 ‘칼레의 시민들’이라는 희곡을 썼다. 그런데 카이저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희곡으로 옮기는데 그치지 않고 여섯 명의 시민을 확대해 일곱 번째 인물을 추가함으로써 갈등 구조를 확대했다.

카이저는 사건의 중심을 영국 왕이 요구한 여섯 명의 시민이 누가 되느냐의 문제에서, 일곱 명의 선발된 시민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제외돼 생존하게 되느냐의 문제로 옮긴 것이다. 희생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추한 인간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아울러 새로운 영웅상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카이저의 희곡에서는 먼저 희생정신을 행위로 보여주려던 선발된 시민들의 의지는 생존의 욕구로 뒤바뀐다. 일곱 명의 시민들은 최후의 만찬처럼 식사를 함께하고 제비뽑기를 통해 제외될 한 사람을 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들이 보여줬던 숭고한 희생정신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서로가 내심 일곱 번째 시민이 되길 바란다. 제비뽑기로 제외될 사람을 결정지으려던 유스타슈는 여기에 실망하고 제비뽑기 대신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시청 앞 장터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여섯 명을 선발인으로 결정짓자고 제안한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시민들이 몰려들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스타슈를 제외한 여섯 명의 시민들이 집에서 출발해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는 오로지 유스타슈뿐이다.

이 사실에 군중은 분노하고 가장 먼저 스스로 처형을 자처한 유스타슈가 이제는 자신만 살겠다는 꼼수를 부렸다고 비난한다. 급작스러운 리더의 배신에 술렁거리는 군중 앞에 유스타슈의 아버지가 아들의 관을 싣고 나타난다. 그리고 아들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걸어 나가라, 빛 속으로!’ 유스타슈가 남긴 말은 여섯 명의 시민들에게 ‘새로운 행동가’가 되어 생존의 끈에 매달려 어둠의 세계로 회귀하지 말고 빛의 세계를 향해 앞장서 나설 것을 강조한 것이다.

카이저는 이러한 극적 구성을 통해 확고한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내면의 정신만이 이들의 새로운 행동에 실천적 의지와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북한의 연평도 공격으로 우리 사회는 다시금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들고 있다.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는 리더일수록 ‘걸어 나가라, 빛 속으로’라는 유스타슈의 말을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의 자격을 내려놓아야 한다. “전쟁이 나면 군대에 가겠다”는 립서비스보다 ‘병역 미필 리더 훈련소 입소 의무화(취임 전에 입소하면 된다)’와 같은 실천적인 입법안을 발의하는 게 신뢰를 얻는 리더의 길이 아닐까.


[최효찬의 문사철(文史哲) 콘서트] 희생 않는 리더는 존경받을 자격 없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