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과거 수십 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혁명적 변화가 몰려오고 있다.”국내 최대 로펌 김앤장에 근무하는 권오창 변호사는 최근 로펌 업계의 동향과 트렌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응답했다. 권 변호사의 대답 속에는 우리나라 로펌 업계가 최근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로펌 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내년에 예정된 법률 시장 개방 문제다. 권 변호사는 “법률 시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진입 장벽이 높은 가장 폐쇄적인 시장 중의 하나였다”며 “법률 시장이 본격 개방되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지각변동이 로펌 업계에 몰아닥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물론 권 변호사와 반대 의견을 펼치는 쪽도 있다. 국내 대형 로펌사에 근무하는 한 변호사는 “선진 법률 서비스의 노하우를 습득해 장기적으로 국내 로펌들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어느 쪽의 예상이 맞을지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국내 로펌 업계에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커다란 변화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법률 시장 개방 문제는 지난 10월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하면서 로펌 업계에 본격적인 화두로 등장했다.
법률 시장 개방을 두고 정부와 법조계는 각각 정반대의 시각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국내 로펌들의 외국 법률 서비스 시장 및 국제 소송 분야 진출을 위한 준비 무대가 마련돼 장기적으로 법률 시장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 법조계에서는 심각한 인력 유출과 상업성 중시로 국내 법률 시장 전반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양측이 공통적으로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은 경쟁력이 약한 로펌은 도태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함께 개인 변호사들은 시장 기반이 취약해져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법조계 안팎에서 이제부터라도 인재 유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선진 법률 서비스 도입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영국 로펌들, 국내시장 공략 나설 듯
국과 EU의 FTA는 양측 의회의 비준 절차를 거쳐 2011년 7월 1일부터 발효될 예정이다. 협정 발효와 동시에 가장 먼저 국내 진출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는 곳은 영국의 로펌들이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10월 내놓은 ‘한·EU 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EU 역내 시장의 통합 과정에서 외국 시장에 일찌감치 진출한 영국 로펌들이 국내 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와 법조계가 영국 로펌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영국 로펌이 가지는 특유의 ‘시장 지배력’과 ‘공격적 마케팅’ 때문이란 게 중론이다.
영국 로펌은 미국 로펌과 달리 내수시장이 현저하게 작아 일찌감치 해외시장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졌던 역사적 특성도 활발한 해외시장진출에 한몫했다. 세계 톱클래스 수준인 영국의 클리퍼드 챈스나 링크레이터스는 소속 변호사만 3000여 명에 이른다. 웬만한 국내 대형 로펌 변호사 수의 10배에 가깝다. 이들 인력의 상당수는 세계 곳곳에서 선발한 현지 변호사들이다.
김현 서울변호사회장은 “한국 법률 시장 규모가 작아 진출을 꺼릴 것이라는 예상도 있지만 영국 로펌은 소송보다는 금융과 기업 인수·합병(M&A), 기업 법무에 두각을 보이는 점과 홍콩 등에 이미 많은 한인 변호사를 채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개방과 동시에 한국에 진출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로펌의 해외 진출도 활발
영국 로펌의 공격적 특성뿐만 아니라 외국 로펌을 선호하는 국내 기업들의 시선도 국내 로펌 업계로선 걱정거리다. 지난해 법률 서비스 분야의 무역수지 적자는 사상 최대 규모인 4억7000만 달러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로펌이 외국 기업으로부터 벌어들인 돈보다 국내 기업이 외국 로펌에 지불한 비용이 두 배 가까이나 많았다.
법률 시장이 본격 개방되면 적자가 더욱 심화되면서 국내 로펌들이 경쟁 기반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규모를 감안할 때 국내 로펌도 덩치를 충분히 키웠기 때문에 한판 승부를 해볼 만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큰 일본에선 100명 이상의 변호사를 보유한 로펌이 7개지만 변호사 수 100명 이상인 국내 로펌은 9개다. 중국도 변호사 200명 이상의 법률사무소가 4곳 정도에 불과하다. 이미 국내 로펌들이 외국 로펌들과 M&A 자문 시장을 놓고 수년째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점도 경쟁력 강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본격적으로 송무 사건을 놓고 싸움이 붙기 전에 기업 자문 사건을 놓고 경쟁을 벌이면서 ‘싸움의 노하우’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올 상반기 국내 M&A(인수·합병, 출자전환, 기업 분할 등 포함) 법률 자문 순위에 따르면 김앤장이 1위를 차지하고 세종·율촌·광장이 나란히 2~4위에 올랐다. 이어 태평양이 6위, 화우가 8위를 차지해 국내 로펌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외국 로펌들은 5, 7위를 차지한데 이어 9위부터 20위를 싹쓸이하며 바짝 추격하고 있는 양상이다. 국내 법정에서 국내법과 관련된 문제를 다투는 송무 사건은 국내법에 대한 이해에선 국내 로펌이 낫기 때문에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로펌 관계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해외 로펌이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국내 로펌의 최고급 인력을 대거 빼가면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국내 로펌들이 막강한 영국 로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우수한 인력의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한 변호사는 “외국 로펌들이 국내에 진출하면 중견 변호사들에 대한 적극적인 영입 전략을 구사할 것이 틀림없다”며 “중견 변호사들의 이동을 막기 위해서는 로펌 내의 합리적인 보상 구조가 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법률 시장 개방과 맞물려 국내 로펌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아시아권 국가들의 성장성이 주목받으면서 캄보디아·우즈베키스탄 등의 진출을 시도하는 기업들의 M&A, 부동산 개발 등 업무를 지원하는 것이 로펌들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고 있는 것.
국내 법률 시장이 금융 위기 이후 침체를 겪으면서 해외시장의 매력이 부각된 것도 한 요인이다. 법무법인 지평지성은 상하이·호찌민·하노이 등 아시아 지역 5곳에 해외 사무소를 열었다. 지평지성은 국가별 지역 전문 변호사와 M&A·금융·증권 전문 변호사 등 총 60여 명으로 구성된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를 설치, 해외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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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법률 시장 단계적 개방
2년 내 국내 로펌과 업무 제휴 허용
정식 서명된 한·EU FTA가 담고 있는 법률 서비스 개방안은 한미 FTA처럼 단계적 개방을 골자로 하고 있다. 1단계로 FTA 발효와 동시에 EU의 27개 회원국 변호사 자격 소지자가 국내에서 국제공법 및 자격 취득국 법률에 대한 자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외국 로펌의 사무소 개설도 허용된다.
발효 후 2년 내 진행되는 2단계에서는 국내 로펌과 업무 제휴가 허용되고 발효 후 5년 내 열리는 3단계에서는 외국 로펌과 국내 로펌 간의 합작과 이를 통한 국내 변호사 고용이 허용된다. 국내법에 대한 자문은 국내 자격증 취득이 필요함을 명시함으로써 국내 법률 서비스 체계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했다.
다만 한미 FTA에서는 법률 서비스에 대해 외국법 자문사의 본국 직명(Home Title) 사용이 추가적으로 허용된 점이 다르다. 정보 제공의 차원에서 solicitor(영국)나 avocat(프랑스)와 같은 외국법 자문사의 본국 직명 사용을 추가로 허용했다.
김재창 기자 cha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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