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테러로 순국하셨다.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폭격 등으로 무고한 양민들과 젊은 장병들이 희생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잔악함을 새삼 느끼는 동시에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당시 51세셨다. 내가 올해 쉰셋이 되었으니 이미 아버지보다 오래 산 셈이다. 살아 계셨다면 올해 80세.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사신 날보다 홀로 살아오신 날이 더 많아지셨다. 우리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귀여워하셨을까.

아버지는 그토록 짧은 일생을 사시면서도 참 많은 일을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쟁 중에 군 복무를 마치고 20세에 도미 유학, 24세에 대학(노스웨스턴)을 졸업함과 동시에 결혼하셨다.

27세에 법학박사(하버드 법대) 학위 취득 후 귀국, 연세대 법대 교수로 부임하셨고, 1970년 대통령 외교 담당 특별보좌관, 74년 주미대사, 77년 외무부 본부대사, 79년 대통령 외교 담당 특별보좌관, 82년 대통령 비서실장, 83년 순국 등 열정적인 삶을 사셨다.

공부를 마치신 후 정확히 11년을 학자로, 그리고 정확히 11년을 정부에서 일하시다가 홀연히 떠나셨다. 참으로 숨 가쁘게 사신 일생이다. 어머니는 늘 “일찍 가실 줄 알고 그토록 부지런히 사셨구나”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주미대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실 때 나는 미국에서 대학 1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나를 미국에 혼자 두고 귀국하시는 것이 못내 섭섭하셔서 해외 출장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찾아오셨다. 늘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파란 항공 우편지에 빼곡히 아버지 특유의 꾹꾹 눌러쓰는 정확한 필체로 편지를 써서 보내주셨다.

인터넷도 없었고 국제전화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싸던 시절 보내주신 편지는 늘 반갑기 짝이 없었다. 편지 내용은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 등에 대해 간략하게 쓰기도 하셨지만 주된 내용은 어머니와 동생(함재학 연세대 법대 교수)의 근황이었다. 그만큼 가족은 아버지에게 중요했다.

아버지는 한국의 전형적인 ‘근엄한 아버지’보다는 요즘 많이 볼 수 있는, ‘아이들과 격의 없이 놀아주는 가족적인 아빠’셨다. 어려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는 아버지와의 ‘씨름’이었다. 방바닥에서 아버지와 뒤엉켜 힘을 낑낑 쓰고 있으면 아버지는 져주는 척하시면서 밑에 깔리시고 또 번쩍 안으셔서 나를 누르는 척하시곤 했다. 동생이 태어나 가세하면서 우리 삼부자는 집 안에서 연일 씨름판을 벌였다.

아버지는 평생 내게 언성 한 번 높이셨던 적이 없다. 그 대신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엄격하셨다. 늘 일은 철저하게 하시지만 집에 일을 갖고 오시는 법이 결코 없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집 안 식구들을 위해 쏟으셨다.

저녁 식사는 빠짐없이 집에서 하시고 식구들과 TV 보고 밤에 ‘후식’으로 과일 등을 같이 먹으면서 모두가 웃고 떠드는 것이 우리 집안의 ‘전통’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분들이 아직도 아버지를 ‘공인’으로 기억하지만 내게는 씨름을 같이해 주시던 ‘아빠’, 집안 대소사를 알려주는 잔잔한 편지를 보내 주시던 자상한 아버지다.

나는 요즘 들어 모든 일을 할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아버지의 지혜, 조용하지만 정확한 판단과 단호한 결단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보다 나이를 많이 먹게 되니 나는 과연 아버지와 같이 열심히 올바르게 살아왔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답은 물론 ‘아니다’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그래, 넌 할 수 있어’라고 특유의 온화한 말투로 격려해 주셨을 것이다. 늘 그러셨듯이.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1958년생. 미국 칼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했으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유네스코본부 사회과학국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