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손 내민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제2의 그리스’가 될 것인가. 아일랜드가 유럽연합(EU) 및 국제통화기금(IMF)과 850억 유로 수준의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하면서 유로존 경제는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구제금융 신청 보도가 흘러나올 때만 해도 ‘경제 주권’을 내세우며 이를 부인하던 아일랜드 정부는 1주일 만에 태도를 바꿔 국제금융 시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벌렸다.

사실 아일랜드 경제가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은행 부실을 채우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크게 늘어난 부채와 악화된 재정으로 아일랜드 경제에는 이미 적신호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무너진 ‘켈트의 호랑이’
<YONHAP PHOTO-1687> Unidentified men pause outside a recently sold house in north Dublin, Ireland, on Wednesday, Jan. 28, 2009. Property prices have plummeted across Ireland, especially in Dublin. Photographer:Crispin Rodwell/Bloomberg News/2009-01-30 23:49:56/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Unidentified men pause outside a recently sold house in north Dublin, Ireland, on Wednesday, Jan. 28, 2009. Property prices have plummeted across Ireland, especially in Dublin. Photographer:Crispin Rodwell/Bloomberg News/2009-01-30 23:49:56/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B(Allied Irish Bank)와 앵글로 아이리시 등 부실채권이 쌓인 은행들의 자력 증자가 어려워지자 아일랜드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국유화 수순을 밟았다. 현재까지 은행 구제를 위해 들어간 공적자금만 어림잡아 500억 유로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은행 부실이 금융 시스템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원했던 공적자금 지출은 고스란히 재정 적자로 이어졌다. 아일랜드의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4.6%(지난해 기준) 에 이른다.

EU 내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아일랜드의 재정 적자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독일의 재정 적자는 GDP 대비 3%, 프랑스는 7%대를 유지하고 있고 그리스가 13.6%에 이른다. 수치로만 따지면 아일랜드의 재정 적자는 그리스보다 심각한 상태에 내몰려 있다고 할 수 있다. EU의 재정 적자 가이드라인은 GDP 대비 3%다.

아일랜드 정부가 구제금융 관련 보도를 부인할 당시만 해도 정부 관리들은 내년 중반까지 돌아올 국채 만기를 맞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2014년까지 재정 적자 비율을 3% 가이드라인 수준까지 끌어 내리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향후 4년간 재정 긴축 계획을 내놓겠다며 시장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구제금융이 소문에서 현실로 바뀌면서 이런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유럽의 신흥 부국으로 많은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던 아일랜드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됐을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일랜드 경제는 낮은 실업률에 유럽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켈트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더욱이 낮은 세율을 보고 몰려든 수많은 다국적기업들은 아일랜드 경제의 부흥을 떠받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1999년 유로화 도입 이후 낮은 이자율 덕에 부동산 붐이 형성되면서 재앙의 조짐이 잉태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가 다국적기업의 거점이 되면서 부동산 거품이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부동산 거품 폭발에 따른 위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정부와 금융권은 조기 경보 체제를 발령하지 못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부동산 개발에 따른 세수 증대 효과에만 취해 왔고 은행들은 은행들대로 부동산 대출 증가에 따라 톡톡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아일랜드 정부가 그냥 앉아서 당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 3월부터 자산관리공사를 통해 주요 은행들이 갖고 있는 부실채권을 대량 매입했다.

그러나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아일랜드 정부는 아직 확정된 금액이 아니라며 부인하고 있지만 850억 유로라는 천문학적인 구제금융 규모가 이를 말해준다.

아일랜드 정부가 사실상 백기 항복함으로써 이제 시장의 관심은 아일랜드 재정 위기가 인접한 다른 유럽 국가들로 번질 것인지에 모아지고 있다. 이미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같은 주변국들이 노심초사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GDP 대비 재정 적자 규모로만 보면 아일랜드보다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부채 규모는 아일랜드보다 높다. 스페인은 이미 아일랜드와 같은 부동산 거품과 붕괴를 이미 경험한 바 있고 현재 실업률이 20%를 넘는 등 최악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최근 유로화 강세에 따라 관광객 수요가 줄어드는 것도 재정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웃 나라 영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왕립스코틀랜드 은행(RBS)이나 로이드(Lyods) 뱅킹 그룹처럼 영국 정부의 공적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은행들이 아일랜드 기업에 대출해 준 금액에 문제가 생기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RBS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4위 은행인 얼스터 은행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유로화를 쓰지 않는 영국 정부가 유럽중앙은행(ECB)의 움직임과 별도로 아일랜드를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 빠르게 나선 것도 이런 배경이다.
[유럽] 거품 붕괴 ‘도미노’…그리스 이어 ‘백기’
아일랜드 경제 위기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EU 금융 감독 시스템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EU가 유럽 내 91개 은행을 대상으로 올해 초 실시했던 재무 건전성 평가(스트레스 테스트)의 신뢰도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U는 지난 7월 평가 대상 은행의 8%에 불과한 7개 은행만이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투자자들과 예금 고객들은 테스트를 통과한 대부분의 은행들이 건강검진에서 아무런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이번에 아일랜드 경제를 위기를 몰고 간 1, 2위 은행인 뱅크 오브 아일랜드(Bank of Ireland)와 AIB 등은 당시 버젓이 합격 통보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스트레스 테스트가 얼마나 엄격한 기준 아래 치러졌는지 의구심이 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아일랜드 위기와 관련해 또 하나 관전 포인트가 있다. 과연 아일랜드 국민들이 구제금융의 채권자라고 할 수 있는 EU나 IMF가 내세우고 있는 자금 공여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점이다.

가장 큰 관심사는 법인세 인상을 수용할 것인지 여부다. 현재 12.5%인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은 EU 평균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다.

구제금용 조건 ‘법인세 인상’관심

아일랜드는 이렇게 낮은 세율을 기반으로 외국 기업을 끌어들여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강소국 경제’의 모델로 꼽혀 왔다. 반면 유럽의 경쟁국들은 아일랜드의 법인세에 대해 계속 불편한 심경을 노출해 왔다.

아일랜드가 EU와 IMF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게 되자 이미 유럽의 맏형 격인 독일과 프랑스 등은 아일랜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법인세 인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EU가 구제금융을 주는 만큼 국내 정책에서도 자구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법인세 인상은 그 출발점인 셈이다.

현재 아일랜드 정부 관리들은 법인세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아일랜드 경제를 이끌어 온 성장 엔진이나 다름없는 법인세를 올리는 것은 오히려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국내 정치적으로 보면 아일랜드 국민들이 갖고 있는 강한 민족적 자긍심도 세제 개편과 같은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이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고 국민의 90% 가까이가 가톨릭교도다.

독립국가로서의 민족의식이 대단히 강한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외부 압력에 의해 세제 개편 같은 국내 정책의 변화를 강요받는데 대해 거부감이 크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일랜드가 끝까지 이런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미 그리스가 EU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세율 조정 등 국내 경제정책 변화를 수용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IMF는 실업수당이나 최저임금처럼 복지 정책과 관련돼 있는 정부 지출에 대해서도 정책 권고라는 방식으로 개입하고 나설 태세다. 아일랜드는 유로존 중 최저임금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다. 아일랜드의 구제금융 수용은 위기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인 셈이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