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유골 진위 논란

독재자의 말로는 죽은 뒤에도 끝까지 편치 못한 모양이다. 지난 1989년 사망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유골이 최근 신원 조사를 위해 발굴됐다. 묘지에 묻힌 시신이 실제 차우셰스쿠 부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7월 21일 “루마니아 수사 당국이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군인 묘지에 매장된 차우셰스쿠 부부의 유골을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YONHAP PHOTO-0256>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 20주년

1989년 12월 22일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 정권을 무너뜨렸던 민주화 혁명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1일 부쿠레슈티 대학광장에서 열린 가운데 시민들이 '영웅은 죽지 않는다'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20년 전 시위에서 처음 선보인 구멍 난 국기를 흔들고 있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1천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차우세스쿠 부부는 그해 12월 25일 처형됐다. (AP=연합뉴스)/2009-12-22 13:17:39/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루마니아 민주화 혁명 20주년 1989년 12월 22일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 정권을 무너뜨렸던 민주화 혁명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1일 부쿠레슈티 대학광장에서 열린 가운데 시민들이 '영웅은 죽지 않는다'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20년 전 시위에서 처음 선보인 구멍 난 국기를 흔들고 있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1천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차우세스쿠 부부는 그해 12월 25일 처형됐다. (AP=연합뉴스)/2009-12-22 13:17:39/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루마니아 정부가 차우셰스쿠 사망 20여 년 만에 유골을 다시 발굴한 것은 차우셰스쿠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다. 조사 당국은 발굴한 유골에서 DNA를 채취했다.

이른 아침부터 겐차 군인 묘지에서 감식반원들이 차우셰스쿠 부부의 무덤을 열고 두 구의 시체에서 시료를 꺼내는 작업을 하자 먼발치에서 이를 바라보던 노년의 군중이 착잡한 표정으로 웅성대기 시작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차우셰스쿠의 강압 통치 시대를 기억하는 일부 노인들은 옛 생각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감식반원들은 두 시간여의 작업 끝에 관 속의 시체에서 일부 DNA 시료를 채취한 뒤 다시 관을 밀봉했다. 법의학자들은 조직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거쳐 이들이 정말 25년간 독재를 펼치다 처형된 차우셰스쿠 부부의 유해인지 확인할 계획이다.

1989년 동유럽 철권통치가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장기 독재를 해 오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분노한 군중에게 체포돼 간단한 재판을 거친 뒤 총살됐다. 당시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 장면은 TV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전해졌고, 1980년대 말 동유럽의 벨벳혁명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공식적으로는 차우셰스쿠 부처가 총살된 뒤 곧바로 겐차 군인 묘지에 아무런 표지도 없이 매장된 것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차우셰스쿠의 실제 매장 장소가 겐차 군인 묘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차우셰스쿠의 유족들이 부모의 묘소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밝혀달라는 소송을 내기도 했다. 루마니아 내 반정부 세력인 구 엘리트 세력들은 사회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차우셰스쿠의 최후에 노골적인 의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독재자 시대에 대한 향수도 있어

이 같은 상황에서 차우셰스쿠의 아들 발렌틴과 딸 게오르제 차우셰스쿠 등 삼 남매는 지속적으로 법원에 자신의 부모 시체에 대한 DNA 검사를 요청했다. 최근 5년여에 걸친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 차우셰스쿠의 세 자녀 중 두 명이 노령 등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루마니아 일각에선 차우셰스쿠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했다. 차우셰스쿠의 유일한 혈족인 발렌틴과 사위 미르세아 오프레안 등도 시체에 대한 명확한 감식을 끝까지 요구했다.

결국 2008년 법원이 DNA 분석 요청을 받아들여 이날 발굴이 이뤄졌다. 유전자 감식을 통한 신원 확인에는 최고 6개월가량이 걸릴 예정이다.

1965년부터 25년 동안 강압 통치를 펼쳐온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비밀경찰 조직인 ‘세쿠리타테’를 활용해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집권 기간에 6만여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89년 12월 25일 반정부 시위대에 붙잡힌 차우셰스쿠는 특별군사법정에서 반역·살인죄를 선고 받고 2시간 만에 부인과 함께 총살됐다.

그러나 루마니아가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등 변모된 모습을 보였지만 경제 발전이 더뎠고,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유럽 재정 위기 등 극심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루마니아 일각에서 상대적으로 경제가 안정됐고 빈부 격차가 적었던 차우셰스쿠 시대에 대한 향수가 불면서 차우셰스쿠 케이크와 차우셰스쿠 보드카, 차우셰스쿠 초콜릿 등 기념품이 선보이는 등 이상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화장품과 음료수, 스포츠 용품에 이르기까지 차우셰스쿠 브랜드가 등장하고 있다. 차우셰스쿠의 자손들은 170파운드의 비용을 정부에 지불한 뒤 차우셰스쿠 관련 상품에 대한 독점적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독일 영화감독이 제작한 차우셰스쿠의 최후를 다룬 영화가 “차우셰스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라는 이유로 강한 반발에 직면, 일반 상영에 실패하기도 했다.

김동욱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