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 동부자산운용 투자전략본부장

[Focus] 명곡 ‘마법의 성’ 주인공 … 여의도서도 ‘홈런’
‘편안하다.’ 이 한마디로 그와의 인터뷰를 간단히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법의 성’, ‘여우야’, ‘편지’, ‘동경소녀’ 등 많은 히트곡을 부른 가수 김광진(46). 하지만 그가 한편으로는 여의도의 이른바 ‘잘나가는’ 증권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뛰어든 시점이 증권가에 입성한 후라는 것. 국민 노래라고 불릴만한 ‘마법의 성’도 그가 삼성증권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 가지 일을 성공하는 것도 힘든데 그는 증권맨으로서도, 음악인으로서도 모두 성공 가도를 달렸고 또 현재도 그러하다. 지금은 재충전하기 위해 잠시 음악 활동을 쉬고 있다는 김광진. 그를 햇빛이 따가운 7월의 오후에 여의도 동부자산운용 본사에서 만났다.

언제부터 음악을 가까이 했는지요.

어렸을 때 7남매로 자랐는데, 어머니가 음악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두가 악기를 다룰 수 있었고요. 형과 누나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자주 들었던 것이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저는 악기를 잘 다루지 못했는데, 대중음악 쪽에 관심이 많아 기타를 배웠죠. 중학교 때 가수나 작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실용음악과가 없어 혼자 연습할 수밖에 없었어요. 누구한테 본격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그저 노래를 많이 들었죠.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학교 앞 카페에서 노래 발표회를 열었어요. 그런데 가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어요. 연세대 상경대 가요제에서 1등, 3학년 때 전체 가요제에서 1등, 4학년 때 백주년 기념관에서 1등을 했어요. 2등은 김창기였고 3등은 안치환이었어요. 3명이 신기하게 모두 가수가 됐죠.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갔죠. 저도 사실 서울대에 가고 싶었는데 학력고사를 제대로 못 본 탓에 갈 수 없었어요.

마침 형님 중 한 분이 연세대 출신이었는데 연세대에 가라고 해서 들어갔던 거예요. 지금 생각하기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저한테는 역시 서울대보다 연세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대학에 다니며 학회나 스터디 모임을 가졌던 적은 있나요.

학회에서 잠깐 활동한 적은 있어요. 그런데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어요. 영어회화 동아리에도 들어갔었는데, 거기에서 영어 교습가로 유명한 문단열(성신여대 교수) 씨를 만났죠.

대학에 다닐 때에는 주로 어떤 고민을 했습니까.

항상 음악에 대한 생각이 많았어요. 어떻게 하면 음악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죠. 대학가요제에 나가도 봤지만 항상 예선에서 탈락했죠.

유학도 고민이었는데 석사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에 준비했고 좋은 결과가 나와 MBA(미시간주립대 경영학)에 갈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는데 증권맨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무 생각 없었어요.(웃음) 증권이나 파이낸스 계통에 대해 특별한 목표 의식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마케팅이나 광고 쪽이 저한테 어울리는 직업이 아니겠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당시 생각하기에 증권 쪽이라고 하면 왠지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돈도 잘 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요. 그래서 시작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 하고 있는 거죠.

펀드매니저로서, 또 뮤지션으로서 모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제한된 시간 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점점 게을러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여러 일을 함께하다 보면 산만해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요. 하지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학 생활 때 과제물이 많았는데, 잠을 줄여 하기에는 체력이 많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잠을 충분히 자고 깨어 있을 때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했죠.

가수로 성공한 것에는 운도 조금 작용했던 것 같아요. 가수로 성공했을 때가 삼성증권에 다니고 있을 때인데, 당시 일을 하면서 가수를 한다는 것이 쉽게 통용되는 사회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삶의 질’ 이야기가 나왔고, 앨범도 히트하면서 회사에서도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어요.

1998년에 잠시 증권가를 떠나기도 했는데요.

그때 터졌던 외환위기 때문에 사회가 전체적으로 어려웠어요. 그래서 저도 좀 힘들었고, ‘차라리 다 접고 음악만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여의도에서 나왔는데, 결과적으로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여의도로 들어왔죠.

펀드매니저와 뮤지션을 병행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지요.

두 가지 다 잘될 수 있고 안 될 수 있는데요, 포트폴리오 차원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일동 웃음)

두 가지 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일단 대중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는 부분이 굉장히 닮았어요. 주식 쪽은 정말 좋은 회사라도 이 회사를 사람들이 좋아해 줘야 한다는 것이고, 뮤지션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저는 음악의 경우에는 대중의 생각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 주관을 많이 관철하는 편이에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저보고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에 감사해야겠다는 마음이 가끔 들지만 지금까지 해 왔던 길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마법의 성’으로 성공하긴 했지만 그 후에 실패한 적도 많고, 그러면서 음반 판매량도 계속 신경 쓰게 됐고요. 또 직장 생활에서도 성과를 많이 내고 열심히 했어도 ‘쟤는 언제든 가수를 하지 않을까’와 같은 삐딱한 주변 인식 때문에 때로는 약간 불이익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일을 했던 것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관심 있는 것을 여러 가지 해 나가면서 얻는 경험들도 소중한 것이죠. 또 그러다 보면 기회를 얻는 경우도 많고요.

음악을 예로 들면, 충분히 좋은 실력을 가진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언젠가 좋은 음악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약력 : 1964년 인천 출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미시간 주립대 MBA. 89년 장은투자자문 입사. 92년 솔로 앨범 ‘Virgin Flight’ 발표. 94년 삼성증권 재직하며 더클래식 결성, 1집 ‘마법의 성’이 공전의 히트. 2002년 4집 ‘Solveig’ 발표, 동부자산운용 입사. 2008년 5집 ‘Last Decade’ 발표.

양충모 객원기자 gaddj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