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을 이어온 로스차일드가 형제 경영의 비결

유럽 5개국에서 활동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일까. 놀랍게도 ‘로스차일드는 하나’라는 형제간 ‘파트너십 경영’ 원칙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1996년 영국 런던 로스차일드가 저택에서는 런던 로스차일드 창업자 네이선의 후손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아들 암셸(1955~1996)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업을 성공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암셸은 32세 때 아버지가 운영하는 로스차일드 은행에 합류해 35세 때 로스차일드 자산운용(RAM)을 맡았다.

런던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자산운용 회사를 전 세계 네트워크로 확장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암셸은 사업 확장에 따른 스트레스로 죽음에 내몰린 것이다.

그가 죽은 뒤 후임 선정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3개월 후 그의 프랑스 사촌 다비드가 로스차일드 은행의 해외 투자 업무를 조정하는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그가 이사회 부의장을 맡고 있었다지만 파격적인 선임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국제금융 네트워크를 처음 선보인 후 프랑스와 영국의 로스차일드 일가 은행 지점들이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다시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2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다섯 형제간의 ‘파트너십 경영’이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바로 로스차일드가를 창업한 선조의 유언, 즉 ‘다섯 개의 화살이 한 묶음으로 유지될 때 부러지지 않듯이 다섯 형제간에 화합하라. 흩어지면 번영은 끝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실행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로스차일드 일가는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으로 엮어지는 가족의 연대감으로 위기를 돌파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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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단점 보완해 주는 조직력 돋보여

로스차일드 가문에서는 아무리 개개인이 총명하더라도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집단의 힘을 활용해 대처해 왔다. 형제나 사촌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

아무리 새로운 시대가 열려도 로스차일드가에서 이 가풍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로스차일드가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모두 일가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한 로스차일드(Rothschild)가는 1750년부터 사채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8세대, 250여 년에 걸쳐 세계 최대의 금융 제국을 유지해 오고 있는 신화적인 가문이다.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고리대금업을 시작해 1800년에 은행을 만들었다.

이어 다섯 아들이 프랑크푸르트(장남 암셸)를 거점으로 오스트리아 빈(2남 살로만), 영국 런던(3남 네이선), 이탈리아 나폴리(4남 카를), 프랑스 파리(막내 제임스)에 지점을 세웠다. 각 지점들은 서로 파트너십 관계를 맺는 형태를 취했다.

‘주역’에서는 흔히 모험 정신을 ‘이섭대천(利涉大川)’에 비유한다. 이섭대천은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는 말로 모험 정신을 상징한다. 하늘이 정해준 시간과 땅이 베풀어 준 환경이 구비되고 나를 도와줄 인재가 나타나는 순간이 기다림을 마치고 이섭대천의 위대한 모험을 감행할 타이밍이라고 ‘주역’은 강조한다.

‘주역’에서 말하는 최고의 기다림은 ‘수우주식 정길(需于酒食 貞吉)’로 표현된다. 가족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경영하고 자신의 활동도 잘 유지하면서 기다리는 것이고 이렇게 현실에 충실한 기다림은 그 끝이 길하다는 것이다. 흔히 주변에서 그런 기다림 없이 저돌적으로 모험을 감행하는 이들을 볼 수 있고, 대부분 그 끝이 길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로스차일드 가문이 국제금융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터닝포인트가 된 게 바로 삼남이 감행한 영국으로의 ‘이섭대천’이었다. 성격이 저돌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셋째인 네이선이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에서 면직물 사업에 손을 댔고 전쟁 통에 형제들과의 정보 교류를 활용해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장남은 보수적인 원칙주의를, 차남은 도전적인 모험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들이 몸담고 있는 기업의 업종도 정보기술(IT)이나 서비스 등 비교적 신사업군보다 전통적인 산업군에 속한 케이스가 많다.

‘석유왕’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가 모두 장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굴뚝산업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장남들이 많다. 반면 차남은 창조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도전 지향형이 많다.

장남에 비해 융통성이 있고 임기응변에 강하며 도전과 모험적인 성향이 짙다. 그러나 원칙주의와 모험주의가 잘 결합되면 시너지 효과를 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로스차일드가에서도 장남의 ‘원칙주의’와 차남의 ‘모험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하면서 가문의 부침을 막았다. 달리 말하면 유럽의 다섯 개 도시에 걸친 ‘형제 경영’이 세계적인 금융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포트폴리오’였다고 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로스차일드 형제 경영의 구심력이 결국 프랑크푸르트의 장남에서 런던의 차남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현재 로스차일드 형제 경영은 부침을 거듭한 결과 프랑크푸르트(장남)와 나폴리(2남), 빈(4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은 런던과 파리를 중심으로 석유·다이아몬드·금·홍차·와인·백화점·문화·영화·의학·국제금융·철도 등 전 분야에 걸쳐 다국적 조직을 갖고 있다.

여행 싫어한 장남은 가문에서 도태

로스차일드가 형제들의 부침을 추적하다 보면 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행’이 지속 경영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이다. 여행을 즐기거나 자녀들에게 여행을 장려한 형제는 흥했고 여행에 나서지 않은 형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다음 세대를 담당할 ‘젊은 로스차일드’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는데 그중의 하나가 여행이었다.

자녀들은 여행이 주는 흥분, 부모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낯선 장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일도 배우고 가정교사가 완벽하게 가르칠 수 없었던 외국어에도 능숙해지는 계기가 됐다.

파리·나폴리·빈·런던 어디나 가슴 두근거리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특히 영국에 진출한 네이선의 아이들 모두에게 여행은 큰 부분을 차지했다. 네이선의 셋째 아들 앤서니는 괴팅겐과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하고 가정교사와 함께 유럽 여기저기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만은 예외였다. 엄격하고 신앙심 깊은 장남 암셸과 자식이 없는 불행한 부인은 결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여행이 싫었다. 종교의식과 정해진 식사를 엄격하게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형제들과 달리 자신의 야심을 늘 자제했다. 암셸의 생활 방식도 한몫했다. 그는 유대교 음식과 안식일의 엄격한 의식을 지켰고 문화의 자극이 전혀 없는 생활을 불편 없이 지속했다.

이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의 은행 사업 훈련마저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프랑크푸르트의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다른 네 형제의 자녀들이 프랑크푸르트 방문을 꺼렸다.

여행은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준다. 미지의 사람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낯선 자연환경과의 만남, 문화 예술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 유럽 전통 명문가의 경우 고대 유적지로 떠나는 여행을 중시했다.

여행은 충분한 교육을 받은 후 자녀 교육의 마지막 관문으로 자녀 교육의 필수 과정이었다. 여행은 자녀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마지막 교육으로 활용했다. 이를 ‘그랜드 투어’라고 한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의 부침을 보면, 어쩌면 고정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해 다니면서 사는 유목민, 즉 ‘노마드(nomad)’ 정신의 유무가 지속 경영의 비밀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 성공의 DNA가 숨어 있다고 한다면 비약일까.


약력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비교문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