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호화판 여름휴가 ‘된서리’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여름휴가는 큰 기삿거리가 없는 휴가철 신문 경제면의 단골 뉴스다. 그런데 언론들이 전하는 우리나라 CEO들의 휴가 소식은 대부분 천편일률적이다. ‘독서’나 ‘하반기 사업 구상’ 외에 CEO들의 별다른 휴가 계획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외국의 CEO들은 다르다. 모터 레이싱이면 모터 레이싱, 요트면 요트 등 자신만의 취미를 드러내 놓고 즐기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돈이 많이 드는 호사스러운 취미라고 해서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언론들도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가족과의 휴가를 문제 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휴가는 철저히 사생활의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수십억 원대의 연봉을 받는 기업 CEO들의 도덕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이러한 분위기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개념 상실’ 행태에 여론 발끈
<YONHAP PHOTO-0676> REFILE- CORRECTING SPELLING OF BP CEO TONY HAYWARD



Specialist traders work on the floor of the New York Stock Exchange as a television broadcasts BP CEO Tony Hayward  testifying before Congress June 17, 2010. REUTERS/Brendan McDermid (UNITED STATES - Tags: BUSINESS)/2010-06-18 07:02:08/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REFILE- CORRECTING SPELLING OF BP CEO TONY HAYWARD Specialist traders work on the floor of the New York Stock Exchange as a television broadcasts BP CEO Tony Hayward testifying before Congress June 17, 2010. REUTERS/Brendan McDermid (UNITED STATES - Tags: BUSINESS)/2010-06-18 07:02:08/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최근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태에 대한 부실 대응으로 미 의회 청문회에까지 불려갔었던 영국 석유회사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의 CEO 토니 헤이워드가 대표적인 경우다. 헤이워드는 최근 가족과 함께 영국 서해안 도서 지역에서 열린 요트 레이스에 나타나 영국 언론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원유 유출 사태 수습 과정에서 잇단 말실수로 수많은 피해자 가족은 물론 미국 내 여론의 거센 반발을 샀던 헤이워드로서는 잠깐 시간을 쪼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그동안 BP와 헤이워드에 대해 앞장서 공격해 온 백악관의 램 이마누엘 비서실장이 가장 먼저 나섰다. 이마누엘 실장은 ABC방송에 나와 “헤이워드가 BP를 그만둔 후에도 (CEO 출신들이 많은 인기를 누리는) 홍보(PR) 회사 컨설팅은 하지 않을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회사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BP의 홍보 전략 부재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당황한 BP 측은 ‘헤이워드가 원유 유출 사태가 터진 이후 두 달여간 사태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가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상 생활로 복귀할 필요가 있었다’고 요트 휴가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원유 유출 사태 이후 잇단 악재에 시달리며 1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가가 곤두박질칠 정도로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BP로서는 이번 ‘요트 휴가’ 파문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 돼버린 것이 사실이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인 ‘옵서버’지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BP의 CEO ‘요트 휴가’ 파문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기업이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부적절한 여름휴가 행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기업인들은 한둘이 아니다.

지난 2006년 저소득층을 주요 고객으로 했던 적립형 통신판매 업체인 페어팩이 부도를 내자 매달 적립금을 내 온 수천 명의 고객이 돈을 떼이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회사 측이 재정 위기 상황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알리지 않고 고객들로부터 적립금을 계속 받아 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15만 명이나 되는 이 회사의 고객들이 크게 분노했다.

그런데 정작 이 와중에 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는 클라이브 톰슨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인과 함께 쇼핑을 즐기는 모습이 목격됐다. 금융 감독 당국의 조사 후 보고서 작성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2주간의 남미 휴가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8000파운드나 되는 비행기 1등석을 이용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하루에 2500파운드(약 500만 원)나 하는 최고급 호텔을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자 이 회사로 인해 손해를 본 고객들뿐만 아니라 의회에서도 경영진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동산 개발 회사인 브릭스톤의 CEO였던 팀 휠러는 지난 2009년 초 회사가 파산 직전에 처한 상황에서 태연하게 일본으로 스키 여행을 떠났다. 결국 얼마 후 팀 휠러는 이사회에서 면직 조치됐다.

그러나 이사회 결정이 부당하다며 낸 정정 청구 소송에서는 주변에서 이 휴가를 취소할 것을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휠러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던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런던 금융가를 뒤집어 놓은 금융 스캔들에서도 CEO들의 분별없는 휴가 관행은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라는 240억 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한 왕립 스코틀랜드은행(RBS)은 지난 2008년 CEO를 퇴진시키고 스티븐 헤스터를 새로운 CEO로 영입했다.

전임 CEO가 천문학적 경영 손실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둑한 연금을 미리 챙겨 은행을 떠난 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새 CEO로 취임한 스티븐 헤스터 앞에는 이런 무분별한 ‘먹튀’식 보너스 관행을 어떻게 바로잡느냐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연일 정치권과 언론이 나서 금융회사들의 고위험 투자와 고액 보너스 관행을 질타하고 있을 무렵 어느 날 재무부 청사에 나타난 스티븐 헤스터는 놀랍게도 사냥 조끼 차림이었다. 40대 후반의 이 금융권 스타가 사냥 마니아라는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CEO 휴가에 관대하던 분위기 바뀌어
<YONHAP PHOTO-0077> Sailors navigate their boats on June 22, 2010 during the "Kieler Woche" (Kiel Week) watersports festival in Kiel, northern Germany. Organisers expect up to three million visitors to come watch the event which is running until June 27, 2010.     AFP PHOTO  /  CARSTEN REHDER   GERMANY OUT

/2010-06-23 00:38:21/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Sailors navigate their boats on June 22, 2010 during the "Kieler Woche" (Kiel Week) watersports festival in Kiel, northern Germany. Organisers expect up to three million visitors to come watch the event which is running until June 27, 2010. AFP PHOTO / CARSTEN REHDER GERMANY OUT /2010-06-23 00:38:21/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정원사만 8명을 둘 정도로 호화 저택에 살고 있는 그가 영국 귀족계급들을 중심으로 호사스러운 취미 활동 중 하나로 알려져 온 사냥을 즐기는 데 이를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금융 위기의 여파로 금융회사 경영자들이 연일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상황에서 사냥 조끼를 입고 감독 당국 관계자를 만나러 나온 그의 대담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이끌고 있는 회사의 위기 상황과 무관하게 휴가를 즐기는 관행은 비단 CEO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토니 우들리는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연합노조인 ‘유나이트(Unite)’의 위원장이다. 브리티시 에어(BA)가 소속된 상급 노조로 올 초 BA의 조종사와 승무원 파업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BA 조종사와 승무원들의 파업으로 수천 명에 이르는 승객들이 휴가 여행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대소동을 겪었다. 토니 우들리는 시시각각 진행되는 노사 협상에서 BA 사장과 마주앉는 노조 측 협상 대표였다.

그런데 정작 노사 협상이 진행 중이던 어느 날 그는 부인과 함께 저가 항공 중 하나인 이지젯(Easyjet)을 이용해 지중해의 키프로스로 휴가를 떠나는 모습이 포착됐다.

PR 전문가들은 CEO들의 여름휴가도 이제 기업의 위기관리(risk management)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터넷을 포함한 언론 매체의 양적 증가와 함께 CEO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휴가 역시 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BP에 적용해 본다면 BP가 미국에서 발생한 메가톤급 사고로 인해 기업 리스크가 커진 상황에서는 CEO 역시 모든 면에서 언행에 신중을 기했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미국 내 반BP 여론을 등에 업고 헤이워드를 연일 공격해 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헤이워드가 요트 휴가를 즐기던 날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또 다음날에는 조 바이든 부통령과 골프도 했다. 그러나 오바마를 나무란 사람은 없었다.

‘옵서버’가 헤이워드의 ‘요트 휴가’를 비판하면서 인용한 한 PR 전문가의 말은 경영 위기에 처한 CEO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누구도 BP의 CEO가 이 상황에서 하루 정도 휴가를 즐겨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서 휴가를 즐기느냐가 중요하다. 그가 차라리 그랑프리 모터 레이싱을 구경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기름 한 점 없는 대서양 연안에 요트를 띄워 놓고 기대 누워 있는 사진이 (연일 기름 제거 작업으로 여념이 없는) 루이지애나 지역 신문에 어떻게 비쳐졌을지 생각해 보라.”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