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기 - 상지대 부동산법무 전공 김형순 교수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상지대. 녹음이 우거진 대학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김형순(46) 교수는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채점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하지만 불과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김 교수의 직함은 ‘사장’ 혹은 ‘대표’였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그의 첫출발은 ‘한국감정원’의 공채 사원이었다.
직장 생활 6년째에 감정평가사 자격증까지 땄던 그가 과감히 사표를 던진 건 입사 후 딱 10년 만이었다.
“처음 입사할 때부터 10년을 계획했습니다. 충분히 경험을 쌓은 후 제 사업을 하고 싶었죠. 샐러리맨이란 것이 10년을 일해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고 일에 대한 재미 자체도 줄더군요.”
애초에 세웠던 계획이라지만 결혼은 이런 결심이 더욱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정해진 월급으로는 집 한 채 장만하기도 어려워 평생 전세살이를 면하지 못하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감정평가사 자격증과 직장 경력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고향인 충남 천안에 감정평가법인을 세워 최고경영자(CEO)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 3년 정도는 자리를 잡느라 고생도 했지만 이후 인맥을 넓혀 가며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제한된 분야이지만 어디나 그렇듯 경쟁이 치열했고 2~3년 전부터는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서 성장도 둔화되기 시작했다.
“결정을 해야 했어요. 사세 확장 등 과감한 재도약의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하느냐였죠. 처음 같이 시작한 직원들은 10년이 지나니 고액 임금자가 돼버렸고, 대학원 진학 등 재교육 지원도 해봤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도 못했습니다.”
제일 잘하는 일을 찾아라
직장인과 CEO를 거쳐 새로 찾아온 인생 설계의 기회는 우연히 다가왔다. 한국감정평가사협회에 부동산 관련 교수직 의뢰가 들어왔던 것. 2500여 명의 회원 중 ‘자격증을 소지한 박사 학위자’는 40명에 불과했고 대학이 원하는 40대의 젊은 인재는 다시 20명 정도로 좁혀졌다.
정작 자신은 ‘우연한 찬스’라고 말하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회계·법규 등에 문외한인 공대 출신이라는 배경은 부동산 정책 석사 학위를 딴 배경이 됐다.
부동산학 박사 학위도 마찬가지다. 교직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지만 정규 학위를 통해 스펙을 넓혀두자는 생각에 회사 운영 틈틈이 공부한 결과였다.
“박사과정 중에 논문을 다섯 편 정도 썼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칼럼보다 제대로 된 글을 한 번 써보자는 생각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교수 임용에 가장 큰 점수를 차지한 게 논문 실적이었더군요.”
김 교수는 지금도 교수가 인생의 마지막 이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부동산 종합 기업을 세워 부동산을 선진 산업 분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도 “부동산은 복덕방이 아니다”는 말이다.
“부동산 평가부터 분석, 중개에 이르는 토털 기업을 세우고 싶습니다. 어떤 분야든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전도사’가 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죠. 부동산을 통해 그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사업 현장을 떠나 교단에 서지 않았다면 갖지 못했을 꿈이죠. 치열했던 현장을 떠나 한 걸음 뒤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만큼 시야가 넓어진 거죠.”
약력 : 1964년생. 83년 충남대 건축공학과 졸업. 90년 한국감정원. 99년 프라임감정평가법인. 2007년 단국대 부동산 전공 박사. 09년 상지대 부동산법무 전공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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