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삭감 칼 빼든 캐머런 총리
지난 5월 6일 총선 결과 출범한 영국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 매기 시작했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대폭적 예산 삭감에 돌입한 것이다.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정은 지난 5월 24일 올해 예산에서 62억4000만 파운드(약 11조3000억 원)를 줄이는 재정 긴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전체 정부 예산의 1.6%에 해당하는 액수다. 62억 파운드라는 금액도 당초 예상했던 60억 파운드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번 재정 긴축 계획은 국방과 보건의료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전 부처의 예산 삭감 금액을 모두 열거하는 방식으로 마련됐다. 모든 부처가 예외 없이 전체 예산의 3~5%를 줄였다.
노동연금부는 무려 전체 예산의 5.7%를 삭감했고 산업기술부 예산도 2.9%나 축소됐다. 신규 투자 및 고용 시장 위축 등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년 내 재정 적자 해소 목표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분야는 지방정부에 대한 보조금의 대폭 삭감이다. 이번 방안에서 정부는 낙후 지역 재개발 사업을 뒤로 미루고 영세민 공공주택 공급 예산도 큰 폭으로 줄였다. 심지어 지방자치단체에 배정된 예산 중 일부를 회수하는 조치도 함께 취했다.
영국 정부의 예산 절감 대책은 총리를 포함한 각부 장관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신임 총리는 집권 후 첫 각료회의에서 장관들의 연봉을 5%씩 일괄 삭감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앞으로 장관들은 운전사가 딸린 관용차를 타지 못하게 됐고 고위 공무원들이 해외 출장 때 이용하는 항공기 좌석도 1등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강등됐다. 캐머런 총리는 관저에서 국회의사당까지(5~10분 거리) 아예 걸어서 출퇴근하는 바람에 경호원들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번 재정 긴축 조치는 보수당 정권이 공약한 ‘5년 내 재정 적자 해소’ 공약에 따라 실시되는 것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재정 건전성 문제에 대해 잇따라 경고를 받은 영국 정부로서는 새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보수당이 이끄는 연립정부는 이번 재정 긴축 방안에 대해 과거 13년간 노동당 정부 하에서 방만하게 운용돼 온 정부 재정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해 온 보수당은 이를 위해 노동당 정부가 설치한 각종 위원회들을 폐지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영국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가 어느 정도이기에 이렇게 내각 구성을 마치자마자 복지 혜택 축소 및 신규 사업 중단 등 비인기 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 영국의 국가 부채 및 재정 적자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 차입 규모는 2009 회계연도(2009년 4월~2010년 3월)에 1634억 파운드(약 330조 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1.6%에 이르는 수준이다. 이를 정부의 총부채 규모로 따지면 8900억 파운드로 GDP 대비 62%까지 치솟는다.
부도 위기설마저 돌고 있는 그리스와 비교하면 전체 부채 규모는 아직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공공 분야 지출과 대비한 재정 적자 규모를 보면 그리스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정부는 이번 조치를 통해 영국 경제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우려를 해소하고 국내적으로도 경기 회복 기조를 유지해 나가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이상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함께 나오고 있다. 공공 분야 의존도가 높은 영국 경제의 특성상 재정지출 축소는 곧바로 민간 분야로 파급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억 파운드의 예산을 절감한다는 계획을 내놓은 재무부만 해도 대부분 민간 기업과의 계약을 취소하거나 단가 조정에 따른 재계약을 통해 이를 채워나가야 할 판이다. 공공 분야 지출 축소가 민간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산업계 내부를 들여다보면 희비는 엇갈린다. 정부가 직접 추진하는 각종 국책 사업이 줄어들면서 이를 아웃소싱을 통해 해결하게 되면 정부 조달 시장 등에 참여하는 일부 기업들은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공 분야 지출 축소가 이 분야의 일자리 축소로 이어질 것이 걱정이다. 각 지자체들은 이미 향후 3년 안에 10만 개의 일자리 축소 계획을 내놓은 바 있고 1년 동안 공무원 임금과 신규 임용이 이번 재정 감축 방안을 통해 모두 동결된 상태다.
게다가 미숙련 청년 근로자들은 직업 훈련을 받기 위한 정부 보조금이 대폭 삭감되는 바람에 고용 시장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지자체 예산 축소는 결과적으로 도서관·박물관·스포츠센터 등 공공 분야에서 운영하는 각종 편의 및 문화 시설의 이용 시간 단축 등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불편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저소득층에 대한 일부 재정 지원 사업도 축소 또는 폐지된다.
과거 노동당 정부에서 도입됐던 빈곤층 자녀 보조금 혜택도 내년 1월부터 없어진다. 복지 혜택이 축소돼 이들 가계가 지갑을 더욱 닫아버릴 것이 분명하다.
‘더블 딥’ 지름길 비판도 물론 이런 단기적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재정 긴축을 통해 국제 금융시장에 드리운 영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을 잠재우고 성장 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이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기회비용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긴축적 재정 운용으로 금리를 낮은 수준에 묶어 놓아야만 경기 회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상 최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영국 중앙은행 측도 현재로서는 이런 전망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이런 구상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영국의 주요 수출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 경제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조기 회복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저금리를 믿고 투자에 나설 기업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모멘텀을 잡기 시작한 경기 회복 기조가 어느 정도 안착되기까지는 공공 분야가 경기 회복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현시점에서의 과감한 재정 긴축은 ‘더블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즉각적이고 대폭적인 재정지출 축소에 반대하는 이러한 주장은 보수당과 연정을 이룬 자유민주당의 선거공약 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정 내 소수파인 자유민주당은 총선에서 제1당이 된 보수당과의 연정을 위해 이런 공약을 포기하고 정부 지출을 즉각 줄여나가야 한다는 보수당의 입장에 동의해 줬다.
정부 입장에서는 올해 1분기 경제 운용과 관련해 몇 가지 긍정적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3월까지의 1분기 GDP 성장률이 0.3%로 나타나 당초 예상됐던 0.2%보다 소폭 상승했고 제조업 분야의 회복세가 두드러졌다.
물론 1분기 수치는 최근 유럽 전역을 강타한 그리스발 경제 위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이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금융 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제조업 분야의 리밸런싱(rebalancing)을 목표로 하고 있는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다소 긍정적 신호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공신력 있는 연구 기관들이 GDP 대비 정부 차입 규모가(현재 11.6% 수준) 향후 5년간 지속적으로 떨어져서 2015년에 4%로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현재 정부가 내놓은 재정 건전성 회복 대책이 제대로 실시된다는 전제 하에서다.
영국 정부 일각에서는 새 정부의 재정지출 축소 방안을 놓고 ‘새비지 컷(savage cut)’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깊고 넓게 진행된다는 의미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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