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외로웠던 사나이
달동네 서울살이, 몇 차례 이사를 거치는 동안 다 잃어버리고 없는 아버지의 6·25전쟁 시절 무공훈장과 메달 꾸러미들.

한가득 상자 속에 담겨 묵직하고 자랑스러웠던 그 쇠붙이들이 어떻게 한풀 먼지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일까. 어린 시절, 나름 애지중지 재봉틀 아래 숨겨두고 남몰래 꺼내보곤 했는데,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다니….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고 받은 훈장은 사나이 일생의 자랑거리인데, 아버지는 그 자랑거리 무용담이 허무하게도 이렇다 할 업적 없이 홀홀 떠나신 지 오래다.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이 홀가분하다고 해야 할지, 가슴 미어진다고 해야 할지 나는 아버지의 일생을 제대로 모른다.

1985년 내 나이 스물두 살 때 어느 날 경남 김해, 자취방처럼 비좁은 아버지의 거소(居所)에서 나는 물었다. “일제 강점기인 고등학생이었을 때 일본인 선생을 패고 일본으로 밀항하셨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아버지는 맥없는 걸걸한 목소리로 신음처럼 말꼬리를 끌었다.

“지금은 기억두 잘 안 난다….” 마른기침이 두어 번 이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아버지가 코를 고시는지 드르렁드르렁 소리가 났고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지에서 난생처음 아버지와의 하룻밤, 이제 서울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주섬주섬 들려준 아버지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유복한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고(農高)까지 갔고, 거기서 일생의 전환점인 ‘일본인 선생 폭행 사건’에 연루된다. 그 길로 줄행랑, 일본 본토에서 숨어 다니다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운이 좋았는지 일본 본토에서 5년간 ‘사람 죽이는 훈련만 받다가’ 전쟁이 끝난다. 현해탄을 도로 건넌 아버지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했고 진급을 거듭하다가 6·25전쟁을 만나 몸에 몇 군데 총탄 자국 남긴 전투 등을 거치며 위관급 장교까지 되었다. 전역은 당시 관례대로 1계급 특진한 소령으로 했다고 한다.

전역 이후 아버지는 사회 적응이 힘겨웠는지 직장 생활도 사업도 뜻대로 펼치지 못하셨다. 멀쩡한 처자식, 집을 놔두고 동가식서가숙 팔도를 떠돌았다. 아스라한 아버지의 기억은 뜨문뜨문 잘 이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영향 없이 성장한 아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다른 아들들은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결국 자식에게 온갖 잔정을 다 쏟는 아빠가 되었다. 될수록 아이와 많은 시간을 갖고, 아이의 교육에 ‘부친력(父親力)’을 발휘하며 가족과 함께 일요일 교회에도 가고, 한강에도 가고, 주말 농장에도 가는 ‘좋은 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살이는 남이 조성한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주도하는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가꾸려 노력하고 있다. 일과 사업은 철두철미하게 자수성가형, 나만의 스타일로 정직하게 꾸리려 절치부심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강박감이 은연중에 작동한다.

아직도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다 모른다. 어떤 상처와 고통과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무엇이 아버지를 평생 떠도는 인생으로 인도해 처자식에게 무심한 사람으로 살게 했는지. 아버지는 처자식의 그럴듯한 배웅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가신 외로운 사나이다. 나는 외로웠던 사나이, 아버지의 고독과 비감(悲感)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고, 피가 통하는 만큼 감성도 비슷했다는 것을 느낀다.

가슴속에 아릿하게 와 닿는 신호가 있다. 아버지는 누구에게 보다 아들에게 만큼은 부끄럽고 창피한 존재로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자손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기 싫은 본성.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품고 있을 이 본성은 오늘 나에게도 전해져 내 아들의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기 위한 나의 온갖 노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짐하고 다짐하되 나는 결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친절하고 정직한 아버지가 되리라. 내 아버지가 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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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재테크 주간지 ROI의 금융팀장과 인터넷부동산 텐커뮤니티 부장을 지냈다. 2005년부터 코아씨앤디, 2009년부터 트렌드아카데미 대표를 맡고 있다. 1만5000명의 회원이 가입한 SERI 내 커뮤니티 트렌드연구회의 운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