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서 오너로’ 스타 CEO 3인 밀착 인터뷰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있다가 퇴직한 뒤 자신의 회사를 창업한 오너 경영인들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기업에서 정점인 CEO에 올랐기 때문에 더 이상의 목표를 갖고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데다 대다수가 50~60대로 나이가 적지 않은 것이 걸림돌이다. 또 이미 안정된 생활인지라 자청해 창업 리스크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하지만 앞으로는 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도모하는 퇴직 CEO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경제활동 기간도 연장될 수밖에 없는 데다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차츰 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너 경영인이 가지는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월급쟁이 CEO는 자의와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그만둬야 하는 자리로 60세를 넘기기가 사실상 쉽지 않다. 특히 40대 중·후반이나 50대 초반에 CEO에 취임한 이들은 힘이 남아도는 나이에 회사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오너 경영인이 되면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고 사업이 잘 풀리면 월급쟁이 CEO는 꿈도 꾸지 못할 재산을 모을 수 있다. 재미와 보람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일을 직접 찾아 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다.

대기업 CEO로 활약하다가 퇴직한 뒤 창업해 오너 경영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전 라미화장품 사장), 유승렬 벤처솔루션스 사장(전 SK 사장), 조운호 얼쑤 사장(전 웅진식품 사장) 등 3인을 만나 그들만의 변신 스토리를 들어봤다.

◇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전 라미화장품 사장) = 서울 서초구 코리아나 사옥 앞마당에 벤츠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유상옥(77)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봄 햇살이 좋아서인지 10여 분간 주변 길을 산책한 뒤 건물로 들어갔다. 유 회장의 풍모엔 여유가 가득했다.
“죽을 각오로 일하면 천리 밖도 보인다”
유 회장은 대기업 전문경영인을 거쳐 창업 오너로 성공한 1세대 경영인이다.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해 35세에 기획관리 이사가 되고 쓰러져 가던 라미화장품을 맡아 반석에 올려놓았지만 1989년 어느 날 오너 회장으로부터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쫓겨났다”고 한다.

이런 게 월급쟁이의 한계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직접 화장품 회사를 차리고 5년 만에 134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성공 가도에 접어들었다.

시판 중심의 기존 화장품 판매 방식을 직접 판매로 돌린 것과 라미화장품에서 따라온 직원들이 열심히 뛴 덕이라는 게 유 회장의 회고다. 유 회장은 창업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여러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경영인은 임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합니다. 그리고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회사 운명이 어떻게 되는 게 아니지요. 하지만 오너가 잘못하면 회사는 모든 걸 잃게 됩니다. 그 책임감과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창업을 하려는 직장인에게는 쓴소리 겸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팁’을 전했다. “사장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풍부한 경험을 갖고 나와 창업을 하는 게 의미가 있지만, 이 경우 죽을 각오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을 각오가 돼 있으면 눈에서 빛이 번쩍 번쩍 나고 뭐든지 다 보입니다. 천리 밖도 보여요. 하지만 월급쟁이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면 필패하고 말아요. 실패하는 사람이 많은 게 모두 이 때문이지요.”

그는 “창업 후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아주 중요한 점”이라고 덧붙였다. 우선 본인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역시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기업 직원은 교육 훈련이 잘 돼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찾아 합니다. 하지만 창업 초기 중소기업 시절에는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해요. ‘직원들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믿고 맡겨서는 안 되고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저절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너 경영인으로서 자긍심도 숨기지 않았다. “오너 경영인이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힘든 만큼 보람이 더 크다”고 답했다. “오너 경영인은 오너만의 보람을 느낀다”는 그의 말에서 경영으로 잔뼈가 굵은 원로의 위엄이 느껴졌다.

◇ 유승렬 벤처솔루션스 사장(전 SK 사장) =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SK 전신인 유공에 입사해 SK그룹 구조조정본부장에 이어 쉰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SK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유승렬(60) 벤처솔루션스 사장.

SK그룹에서 가장 잘나가던 CEO였던 유 사장은 2002년 4월 갑자기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최태원 회장과의 갈등설이 나돌 정도로 그의 사임은 회사 안팎으로 충격적이었지만 그가 털어놓은 ‘사퇴의 변’은 단순했다.
“죽을 각오로 일하면 천리 밖도 보인다”
“사표를 내기 2년 전쯤이었어요. 유명한 의사가 회사에서 건강 세미나를 열었는데 남자 3명 중 1명은 90세를 넘긴다며 거기에 맞춰 인생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요. 60세에 은퇴하면 30년 동안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앞날이 막막해지더군요.”

SK를 나오자마자 벤처솔루션스라는 회사를 차렸다. 중소기업에 경영 자문을 해 주는 회사다. 평소 대기업에서 익힌 경험을 중소기업에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SK를 나오자마자 중견 그룹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적지 않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시 전문경영인으로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은퇴를 원할 때까지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은퇴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대기업에서는 내가 아무리 원해도 언젠가는 자리를 비켜 줘야 합니다. 내가 즐거운 일을 찾고 그 일이 중소기업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입니다.”

주변으로부터 ‘후회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자주 듣지만 그때마다 그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며 손사래를 친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취미 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무엇보다 중소기업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는 말이다.

실제로 8년 만에 만난 기자의 눈에 그의 인상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안경 밑으로 흐르는 날카로운 눈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둥글둥글한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속으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는 SK 사장 시절 최고의 VIP 대접을 받았다. 특히 중동·일본·싱가포르 등으로 출장을 가면 조찬 미팅부터 하루에 7번 이상 만남을 가질 정도로 찾는 이가 많았다.

사장직을 그만두면 당장 지위의 변화로부터 오는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CEO들이 많지만 그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지금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는 현직에 있는 후배 CEO들에게 “퇴임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라”고 조언했다. 이는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있으면서 퇴직이 결정된 계열사 사장을 면담할 때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퇴임 후의 인생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고 회고하고 “그런 경우 퇴직 후 상당히 많은 시간을 힘들게 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리 대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면 큰 충격 없이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한 비결이 바로 이겁니다.”

◇ 조운호 얼쑤 사장(전 웅진식품 사장) = 동결건조공법·발효공법 등 이른바 친환경 가공법으로 30조 원 식품 시장을 석권하겠다며 험난한 창업 오너의 길로 들어선 조운호(48) 얼쑤 사장은 ‘아침햇살’, ‘초록매실’ 등의 히트 제품을 연이어 내놓으며 누적 적자 450억 원의 부실 회사 웅진식품을 메이저 음료 회사로 키운 스타 CEO 출신이다.

언론사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줄을 잇고 기업들과 경제 단체들의 강연 요청이 쇄도해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그다.
“죽을 각오로 일하면 천리 밖도 보인다”
2005년 웅진식품을 떠나 미국 뉴욕에서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던 그는 2006년 의료기 전문 업체인 세라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작년 8월 서울 양재동에 사무실을 내고 오너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세라젬 부회장을 그만두자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식품 업체에서 ‘CEO로 와 달라’는 요청을 몇 차례나 받았지만 결국 창업의 길을 택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찾아오는 기자도 거의 없고 이제 다보스포럼(웅진식품 사장 시절 초청을 받았다)에서도 그를 찾지 않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진 지금, 외롭지는 않을까.

그러나 쓸데없는 우려였다.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눈빛이 살아있고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며 자신감도 넘쳤다. 특히 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내놓은 ‘자연한끼(친환경 가공법으로 만든 선식 제품)’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그는 웰빙 트렌드가 지배하는 식품 시장에 ‘친환경’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전성기 못지않게 뛰고 있다. 한 치도 주저 없이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할 정도다. “갓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확신은 이른 것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미래는 친환경 가공법의 시대”라면서 “동결건조로 만든 ‘자연한끼’와 곧 출시될 발효두유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창업을 위해 오랜 기간 준비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문경영인과 창업 오너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 속엔 창업의 어려움이 녹아 있다.
“죽을 각오로 일하면 천리 밖도 보인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자금 문제는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사업 초기 제품 개발과 생산, 유통 과정에서 예상보다 많은 투자비가 들어간 까닭에, 과감한 마케팅으로 이른 시간 내에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한때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해 돈이 묶이는 경험도 했다. 그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회고했지만 고액의 수업료를 치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아픔이다. 무엇보다 웅진식품 시절 마케팅부서원만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회사 내부의 지원 인력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모든 일을 혼자 결단하고 추진하는 데서 오는 진한 고독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전문경영인일 때는 몰랐던 것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사람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직원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며 “필요에 따라 인력 지원을 받던 때는 몰랐던 것”이라고 되돌아봤다.

“세상에 혼자 잘난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도 창업하면서 새삼 느낀 점이라고 털어놓았다. 내부 직원뿐만 아니라 디자인 회사, 광고 회사 등 회사 밖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귀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기업가 정신을 갖고 소비자를 위해 일하는데, 설령 안 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명감을 갖고 하는 일이기에 두려움도 없다는 것이다.

그의 앞으로의 목표는 의외로 ‘소박’하다. “신명 나는 직장 공동체, 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회사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는 그에게서 스타 CEO일 때와는 다른 따뜻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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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전문경영인 거친 오너 경영인들의 조언

“자기 일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라”

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유승렬 벤처솔루션스 사장, 조운호 얼쑤 사장 등 3인의 스토리는 비즈니스맨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명은 하나같이 ‘주인’처럼 일했고 ‘사장’이라는 목표를 가졌다. 유 회장은 “사장의 목표를 갖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라고 했다. 유 사장은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프로페셔널이다. 프로페셔널이라면 아마추어처럼 일해서는 곤란하다”고 꼬집었다. 조 사장은 “주인 의식을 갖고 일을 해야 사명감이 생기고 일하는 게 영예롭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공부하라’는 것도 이들의 공통된 주문이다. 유 회장은 “트렌드를 읽기 위해서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유 사장도 “어떤 주제를 접하면 최소한 3권의 관련 분야 책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 사장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전체를 보고 부분도 보는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공부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업을 준비하는 직장인에게는 약속이나 한 듯 “일단 직장에서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했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창업을 하더라도 자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조 사장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만이 독립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 회장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독립한 후 가장 큰 골칫거리인 사람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으로 출발하다 보면 우수한 인재를 마음껏 데려올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오너가 신뢰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유 회장 역시 20년 전 창업 당시 전 직장의 우수한 인재들이 자신을 따른 덕에 빠르게 성공을 일굴 수 있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유 회장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이들은 또 “사업을 즐기라”며 입을 모았다. 창업 아이템을 정하는 문제의 경우 기존에 하던 일과 연관을 짓되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일단 시작한 뒤에는 즐기라는 충고다. 유 사장은 “회사에 얽매여 있던 시절의 기억을 빨리 지워버리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지수가 올라간다”고 말했다.

조 사장은 “좋은 직업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고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 일이 즐겁다”며 대의(大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