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위기

그리스에서 촉발된 유럽의 금융 위기가 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국가 전반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외신들은 스페인에 주목하고 있다.

금융 위기의 정도가 심한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가 아닌 스페인이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은 덩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경제 규모는 1조6000억 달러로 유로존에서 프랑스·독일·이탈리아에 이어 4위국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의 4배 규모다.

만일 스페인이 무너진다면 이탈리아와 영국 등도 바로 위험권에 편입돼 그 파장은 전 세계로 번질 수도 있다. 금융 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가 유럽 내 지역 문제로 그칠지, 아니면 세계시장으로 확대될지가 스페인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실 스페인의 외형적인 경제지표는 ‘국가 부도’와는 거리가 있다. 스페인이 금융 위기가 부각된 것은 지난 4월 28일 미국의 신용 평가 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장기국채 신용 등급을 ‘AA+’에서 ‘AA’로 1단계 강등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상위 3번째에 해당되는 수준으로 우리나라보다 높은 것이다.
<YONHAP PHOTO-0617> Traders work at the Bolsas y Mercados in Madrid, Spain, on Friday, May 7, 2010. European stocks sank for a fourth day after U.S. shares tumbled the most in a year as computerized trading exacerbated declines triggered by the Greek debt crisis. Photographer: Denis Doyle/Bloomberg/2010-05-08 06:49:37/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Traders work at the Bolsas y Mercados in Madrid, Spain, on Friday, May 7, 2010. European stocks sank for a fourth day after U.S. shares tumbled the most in a year as computerized trading exacerbated declines triggered by the Greek debt crisis. Photographer: Denis Doyle/Bloomberg/2010-05-08 06:49:37/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정크본드 수준으로 강등된 그리스와는 큰 차이가 있다. 스페인의 총부채 규모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66%로 비교적 안정적이다. 총부채가 GDP 대비 115%에 이르는 그리스의 절반 수준이다.

채권금리도 낮다. 10년물 국채의 경우 이번 위기 과정에서 가장 높았던 때가 4%대에 불과하다. 그리스의 12%대, 포르투갈의 6%대와 비교하면 훨씬 안정적이다.

국가 부도의 지표가 되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도 200bp(bp=0.01%) 미만으로 한때 1000bp에 육박했던 그리스와 역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스페인 엘레나 살가도 재무장관이 “S&P의 신용 등급 하락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면서 “스페인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이런 지표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스페인의 경제가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까지 꾸준하게 성장해 왔던 스페인은 2009년에 성장률이 오히려 마이너스 3.4%로 주저앉았다.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 커

비록 지난 1분기에 0.1%의 플러스 성장을 하면서 7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멈췄지만 올해 전체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S&P는 “스페인이 장기에 걸쳐 경제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는 스페인의 재정 상태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스페인 경기 침체의 가장 큰 요인은 주택 경기의 거품이 꺼지면서 이 나라의 주축 산업이었던 건설업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건설업 비중은 전체 경제의 15%에 이르고 전체 근로자의 30%가 건설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부터 부동산 시장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실업률은 유로존 국가 중 가장 높은 20%나 된다. 국가가 먹여 살려야 할 인구가 늘어나다 보니 정부의 공공 지출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스페인의 재정 적자 규모는 지난해 GDP 대비 11.2%였고 올해도 9.8%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유로존에서 그리스와 아일랜드에 이어 3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스페인의 또 다른 약점은 민간 부채가 많다는 것이다. 민간 부채 규모는 전체 부채의 80%나 된다. 특히 은행들은 그동안 주택 건설 부문에 대한 과도한 대출로 부실채권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보도에서 “미국·영국·스위스 등에서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이 실시됐기 때문에 글로벌 투자자들은 스페인도 은행에 구제금융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은행의 부채는 곧 정부의 부채라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자파테로 스페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스페인의 강력한 예산 삭감과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향후 3년 이내에 재정 적자 규모를 EU의 안정 성장 협약 기준인 3%에 맞출 수 있도록 예산안에서 공공 지출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또 그동안 집권 사회당 정부가 꺼려 왔던 세금 인상 노동시장 유연화, 공공 부문의 채용 동결 등 긴축 조치들도 잇따를 전망이다. 그러나 스페인 노조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고 지방정부들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조치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태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