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들어선 학문의 길
다음의 장면은 나와 이제는 돌아가신 지 십 년도 더 넘은 아버지와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어느 날 주고받은 대화다.

나는 이것을 나와 아버지에 대한 무슨 자랑거리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여하간 나는 그때 상대를 졸업하고 다니던 외국계 은행에서 1년간 근무한 후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열망에 집에 상의도 드리지 않고 사표를 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부모님께는 은행에 간다고 집을 나선 후 다니던 대학의 도서관에서 대학원 진학을 위한 공부를 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평소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중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눈치를 챈 아버지는 당신의 절친한 친구 한 분을 내가 다니던 은행에 보내 채 아무개란 사람이 이곳에 근무하느냐고 물어보게 했다(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내막이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 아셨으니 오는 대로 방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듣자하니 너는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하겠다는데, 그게 네 처지에 가당키나 한 일이냐? 우리가 힘들게 너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이제 직장은 잡았으니 결혼만 시키면 될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냐? 나도 평생 공부하려 했으나 때를 잘못 만나 고생만 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예로부터 학문은 첫째, 뛰어난 두뇌가 있어서 남들 꽁무니 쫓아갈 게 아니라 그들을 앞설 수 있어야 하고 둘째, 건강이 좋아서 몇 날 며칠을 앉아 책과 씨름해도 끄떡없을 체력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집안에 돈이 넉넉해서 사보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사볼 수 있어야 하며 하루 세 끼니 잇는 것이나 방을 덥힐 구공탄 걱정을 해서는 공부고 뭐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스스로도 잘 알다시피 머리도 별로 뛰어나지 못하고 건강은 늘 골골하여 보통도 되나마나 하고 집안 형편은 내가 늙어 이제는 네가 벌어오는 데 의지해 살아야 할 터인데 직장을 그만두면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릴 것이냐?”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말한 세 가지 조건은 괴테가 예술가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 이른바 ‘드라이 게(Drei G)’, 즉 게니(Genie:천재), 게준트하이트(Gesundheit:건강), 겔트(Geld:금전)를 인용한 것이었다. 나는 논리정연한 아버지의 말 앞에 할 말을 잃고 멀쑥이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바로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뒤집어 항변한다는 전략이었다.

“아버지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춰 머리도 뛰어나고 건강도 좋고 게다가 돈도 많다면 과연 누가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출세 따위는 바랄 수도 없는 학문 같은 것을 하고자 하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그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밑천으로 삼고, 강렬한 결핍감과 문제의식을 동기로 만들어 학문의 길로 분투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그 뒤에도 직장 생활을 2년 반 더해 돈을 모아 유학을 갔다. 비록 내가 독자이기 때문에 부양해 줄 다른 자식은 없었지만 부모님은 평생 월급을 쪼개고 쪼개 힘들게 저축한 얼마 안 되는 돈을 은행에 넣고 그 이자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돌아와서 다시 직장에 다닐 때까지는.

아버지는 1903년에 태어나 1997년 아흔다섯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당신의 성장기와 청장년기를 모두 일제강점기에 보내고 광복 후의 격동과 혼란의 시대를 거쳐 온 분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한반도 북단인 함경북도 경원군이고 정규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공부해 그 당시에도 있었다는 검정고시를 보아 서울에 처음 생긴 대학(경성제대)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공립학교 선생님을 오래 하셨다.

나와 아버지의 나이 차이는 오십 년이 넘는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태산준령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나이 들어갈수록 아버지와 나는 갈등하고 투쟁하는 관계가 되었고 그것은 위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당신과 똑같은 길을 가게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필연적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SAMSUNG DIGITAL CAMERA>
채수환 홍익대 영문과 교수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다 미국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공부했다.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서강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홍익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