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달구는 일자리 정책 논란

5월 6일로 다가온 영국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의 정책 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 극심한 실업난과 사상 최악의 재정 적자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치러지는 선거이기 때문에 역시 총선 이슈는 경제 쪽에 맞춰져 있다.

그중에서도 일반 유권자들의 관심은 무엇보다 일자리 문제에 집중돼 있다. 경기 침체로 일자리 숫자가 크게 줄어든 데다 외국 이민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영국인들의 일자리 선택 폭이 더욱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 사이에는 노동당 집권 13년간 지나치게 관대한 이민정책 때문에 그나마 있던 일자리들마저 모두 동유럽 또는 아시아계 외국인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밑바닥 정서가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이민정책 재정비 필요성에 공감
<YONHAP PHOTO-0278> "어이쿠, 수고하셨습니다"



(AP=연합뉴스) 영국 집권 노동당 당수인 고든 브라운 총리(오른쪽)가 15일 영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여야 3당 당수들의 TV 생방송 토론을 마친 뒤 닉 크레그 자유민주당 당수와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 **편집용 국한**/2010-04-16 10:39:41/Media Only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어이쿠, 수고하셨습니다" (AP=연합뉴스) 영국 집권 노동당 당수인 고든 브라운 총리(오른쪽)가 15일 영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여야 3당 당수들의 TV 생방송 토론을 마친 뒤 닉 크레그 자유민주당 당수와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 **편집용 국한**/2010-04-16 10:39:41/Media Only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특히 노동당 이민 정책을 줄곧 비판해 온 야당인 보수당은 현재의 실업난을 노동당의 이민정책 실패에 따른 결과로 규정하고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보수당은 아예 영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 숫자를 19년대 수준으로 다시 끌어내리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증가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하듯 최근 영국 정치권에서는 영국국민당이나 영국독립당 같은 반유럽연합, 극우 정당들도 서서히 세력을 확산해 가고 있다.

이미 스코틀랜드에서는 노골적 백인 우월주의 정책 노선을 표방해 온 국민당이 다수당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독립당 역시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집권 노동당을 제치고 13석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린 바 있다.

집권 노동당 역시 이민정책의 문호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또 이를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이민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캐나다나 호주에서 실시하고 있는 포인트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사실상 이민자 유입 감소 효과를 보기도 했다.

특히 영국의 숙련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 고용이 가능한 직종에 더 이상 외국인 노동자들의 취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노동당 소속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총리직 취임 이후는 물론 과거 재무장관 시절 ‘영국인들의 일자리를 보장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브라운 총리는 ‘일자리 보장’ 공약이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영국인들에게 충분한 기술 훈련 기회를 보장하겠다는 의미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당 장기 집권에 실망한 일반 유권자들과 야당은 정부가 약속을 뒤집었다며 공격해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총선 국면에서 노동당 역시 이민자 규제와 국내 일자리 보호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보수당과 유사한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노동당은 제3당인 자유민주당이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불법 체류자 사면에 대해서도 강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동당 정책이 보수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보수당의 양적 규제와 같은 급진적 이민 정책이 결국 보호주의로 이어져 장기적으로 영국 경제의 활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이민 규제와 영국인들의 일자리 보장이 총선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실업 통계, 그중에서도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영국 실업 추이의 상관관계를 둘러싼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 공영방송 BBC가 각종 정부 통계를 인용해 ‘노동당 정부 하에서 영국 일자리들을 외국인들에게 빼앗겼다’는 밑바닥 정서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 검증 작업을 벌인 것도 이런 논쟁 구도를 반영한다.

BBC는 1997년 노동당 집권 이후 13년간의 일자리 통계를 기초로 영국에서 출생한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의 구직 추이를 분석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1997년 이후 생겨난 일자리의 80% 이상이 외국인에게 돌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1997년 1분기 이후 생겨난 212만 개의 일자리 중 영국인이 대략 38만5000개의 일자리를 가져간 반면 외국인들이 가져간 일자리 수는 172만 개에 이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분석에서 영국인은 순수하게 영국에서 출생한 노동자들만으로 국한했다. 영국에서 출생하지 않았지만 장기 거주하면서 국적을 취득한 노동자들도 많지만 최근 영국 유권자들의 밑바닥 정서로 볼 때 이들 역시 외국인 노동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아무리 낮게 잡더라도 신규 일자리의 60~70% 이상을 외국인들이 가져갔다는 점을 현재와 같은 고실업 사회에서 영국 유권자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이미 고령화 단계로 접어들어 출생률 저하에 시달리고 있는 영국 사회의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지해 온 이 많은 일자리들을 다 채워 넣을 충분한 영국 젊은이들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활동인구 증가 폭이 외국인 경제활동인구 유입 속도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는 지적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BBC 분석에 따르면 영국 출신 경제활동인구는 1997년 이후 35만 명, 비영국 출신은 240만 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10여 년간 영국으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영국인들이 외면해 오던 각종 비정규직에 집중 진출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 외국인 이민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직종의 일자리는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외국인 이민자들이 영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일자리에 ‘플러스알파’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전문가들은 주로 외국인들의 영국 내 경제활동에 따른 국민소득 증가 효과 등을 강조한다. 이는 노동당 정부가 그동안 줄곧 강조해 온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영국인들이 외면해 온 직업군으로 진출해 들어오면서 영국 경제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80% 일자리 외국인이 가져갔다’ 논란

그렇게 보면 ‘노동당 집권 하에서 80%의 일자리를 외국인들이 가져갔다’는 논리는 절반의 진실만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총선에서 이민 노동자 이슈가 크게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영국 출신 노동자들이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지속돼 온 경기 침체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하고 있는 단순 비정규직은 상대적으로 적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단지 경기 침체뿐만 아니라 그동안 누적돼 온 비정규직 확대 등과 같은 요인과도 관련이 있다. 영국 고용 시장에서 비정규직은 공식적으로 경기 침체가 시작된 이후에도 20만 명이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분야도 있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영국인들의 실업난을 단순한 인과관계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직업군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정규직보다는 외국인 위주의 비정규직에 편중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80%의 일자리를 외국인이 가져갔다’는 논리에 어느 정도 함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영국 중간 계층이 느끼는 체감 고용지수가 얼마나 심각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기 침체로 줄어드는 일자리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레 외국인 노동자들로 향하고, 결국 이민자 과다 유입을 초래한 과거 노동당 이민정책에 대한 실망감이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 지지율 추락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총선 결과는 이러한 일자리 변수에만 좌우되지는 않는다. 날로 심각해지는 범죄 예방 문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 적자 등 영국 사회의 당면 현안에 어느 당이 보다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느냐에 따라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의 주인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고용 창출, 그중에서도 영국인들의 일자리 보호 정책은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을 가르는 최대 변수가 될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하원의원들의 주택수당 부당 청구 스캔들로 인해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가운데 치러지는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남의 문제’보다 ‘내 문제’를 챙기는 데 그나마 관심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