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리더십’이 뜬다

전 세계 수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엘리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이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내로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퍼스트레이디를 지냈다.
위대한 리더는 ‘그만의 이야기’가 있다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여성 문제와 인권 문제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한 엘리너는 루스벨트 사후에 유엔 주재 미국 대표로 있으면서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흑인들의 인권에 앞장섰는데 그녀의 노력으로 흑인들이 민주당의 지지층이 되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50여 년 전 엘리너 루스벨트가 뿌려놓은 씨앗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엘리너가 힐러리 클린턴의 역할모델이라는 사실이다.

1930년대 엘리너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관계는 마치 1990년대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를 연상하게 한다. 루스벨트와 클린턴 부부는 모두 부부 관계가 불행했다. 엘리너는 남편의 외도로 불화에 휩싸일 때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를 읽고 또 시를 남편에게 전달하면서 내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목숨 바쳐, 죽도록! 사랑한다고/ 맹세할 수 없다면, 오,/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가 두렵구나!”

엘리너는 엘리자베스의 연시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를 빌려 사랑을 재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엘리너와 루스벨트는 정치적 동반자이자 파트너로서는 이상적이었다. 소아마비였던 루스벨트는 엘리너의 내조에 힘입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에 올랐다.

빌 클린턴 역시 성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힐러리의 선거운동 덕분에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들 부부는 민주당 대통령에 불륜 스캔들, 그럼에도 영원한 동반자의 삶, 그리고 퍼스트레이디 시절 이후 ‘홀로서기’까지 닮아 있다.

루스벨트 부부·클린턴 부부 ‘닮은 꼴’

힐러리는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엘리너와 가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도움을 청한다고 곧잘 이야기하곤 했다. “그때마다 엘리너는 ‘그냥 계속 밀고 나가요. 설명이나 변명 따위는 전혀 소용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어요.” 실제로 힐러리는 클린턴의 스캔들과 그 이후의 대처 방식에서 엘리너를 그대로 참고했다. 엘리너는 남편의 불륜으로 부부 사이가 위기에 처했지만 끝내 이혼하지 않았다. 힐러리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힐러리는 엘리너의 초상 사진과 기념품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을 만큼 엘리너를 추종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백악관 사무실 책상에 엘리너의 액자 사진을 놓아둘 정도였다. “여자는 티백(tea bag) 같아서, 뜨거운 물에 빠지기 전에는 여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힐러리는 엘리너가 말한 이 명언을 늘 가슴속에 새기며 살았다.

엘리너와 힐러리는 공통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신념에 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으면서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두 사람에게서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무소의 뿔처럼 달려간 이들의 이야기에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매력들이 들어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가.” ‘다중지능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하워드 가드너는 ‘통찰과 포용(원제 Leading Minds)’이라는 책에서 리더의 개념을 ‘이야기’와 결부시킨다.

가드너는 리더와 리더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중요한 차이는 그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는 리더십의 상수로 이야기, 청중, 조직, 실천, 직접적인 리더십과 간접적인 리더십, 전문 지식의 문제 등 6가지를 드는데, 여기서 제일 먼저 ‘이야기’를 꼽는다.

이는 ‘직관의 리더’라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CEO)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잡스는 전통적인 리더십의 측면에서 보자면 결코 훌륭한 리더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 구성원들에게 심한 폭언과 경멸, 조롱을 일삼기도 한다. 이른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요구되는 오늘날의 기업 경영 환경에서 그는 마치 이단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에 열광한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그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이야기에는 도전과 역경을 이겨낸 교훈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혁신과 비전, 소통이라는 테크놀로지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들을 담고 있다. 그가 선보이는 제품은 그가 광고 문안으로 제시한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창의성의 산물인 것이다. 그게 잡스만의 메시지이며 이야기인 셈이다.

또한 인도의 독립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민중의 미래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가 많은 인도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특출한 리더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폭력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리더로 김구가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김구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대중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더의 이야기는 그러나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특이성·참신성·혁신성·유용성을 갖추지 못하면 각광 받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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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리더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는 상당한 모험이 따른다. 이야기는 잘못 해석될 수도 있고, 대비하고자 했던 과거의 이야기에 오히려 동화돼 버릴 수도 있으며, 부적절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루스벨트와 링컨은 미국이라는 가족의 개념을 확장해 흑인까지도 포함시킴으로써 일부 백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위대한 프랑스’를 부르짖은 샤를르 드 골은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프랑스로부터 독립시켜 제국주의의 오명을 벗으려고 했지만 수많은 암살 기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리더가 지닌 독특한 이야기만으로 리더십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구비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드너는 강조한다. 그 이야기를 실제로 당대의 사람들 속에 구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자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을 제후들에게 공감시켜 실제로 당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미흡했다.

반면 간디는 인도 민중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이를 인도 민중이 수용해 당대에 그 꿈을 이루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우리가 공자를 리더보다 학자로 기억하고, 간디에게는 명실상부한 지도자의 꼬리표를 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리더는 기업의 CEO나 군사, 정치 지도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드너는 리더를 직접적인 리더와 간접적인 리더로 구분한다. 직접적인 리더에는 나폴레옹, 칭기즈칸 같은 군사 영웅 또는 처칠, 루스벨트, 간디 같은 정치적 지도자가 있다.

간접적인 리더란 피카소, 모차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창의성’을 발휘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뜻한다. 그들의 창작물이나 아이디어, 이론은 수많은 이들의 사고·감정·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특허, 지식과 발명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간접적인 리더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국가와 기업의 생존이 연구와 개발을 관장하는 간접적인 리더의 역량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카리스마로 승부하라.’ 이는 산업사회에 해당하는 버전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승부하라’ 역시 낡은 버전이다. 지식 사회의 리더란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더해 ‘이야기로 승부하라’다. 잡스처럼 비록 강한 카리스마의 리더일지라도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최근 입적한 법정스님은 ‘무소유’와 같은 그만의 이야기로 수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준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위대한 리더는 ‘그만의 이야기’가 있다
최효찬 소장은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