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CEO들의 잇따른 ‘노 보너스’ 선언

영국 금융 산업을 주도하는 대형 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이 지난해 실적에 따른 천문학적 규모의 성과급을 잇달아 포기하겠다고 나서 금융권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금융업의 역사나 다름없는 로이즈(Lyods) 뱅킹 그룹은 CEO인 에릭 다니엘스가 2009년 보너스 230만 파운드(약 41억 원)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왕립스코틀랜드 은행(RBS) CEO인 스티븐 헤스터 역시 160만 파운드(약 29억 원)의 보너스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RBS와 로이즈 그룹은 모두 2008년 이후 극심한 유동성 위기로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은 은행들이다. RBS는 사실상 납세자들의 주머닛돈이나 다름없는 정부 지분이84%, 로이즈 그룹은 43%나 된다.

과다 보너스에 50% 중과세 방침

그러나 영국 금융권 CEO들의 ‘노 보너스(No bonus)’ 선언은 비단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은행들에만 그치지 않는다. 바클레이즈(Barclays) 그룹의 존 발리 CEO와 봅 다이아몬드 은행장 역시 최근 2009년 성과급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바클레이즈 그룹은 RBS나 로이즈와 달리 영국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 없이 금융 위기를 이겨냈다. 특히 바클레이즈는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리먼브러더스의 일부 사업부를 인수하는 저력을 보여준 바 있다.

또 2009년에는 전년 대비 92%의 순이익 증가를 기록하는 등 금융 위기 국면에서 가장 뛰어난 실적을 보여준 은행 중 하나로 꼽혀 왔다.
그렇다면 그동안 고액 연봉과 수십억대의 성과급이 함께 보장돼 부러움의 대상으로 꼽혀 온 이들 금융권 CEO들이 잇달아 보너스 포기를 선언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보너스 포기를 발표한 CEO들은 대부분 수십억 원에 이르는 자신들의 보너스가 정치적·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은행에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나서 CEO와 주요 임원들의 보너스 관행이 여론의 호된 비판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대형 은행들의 무리한 사업 확장과 고위험·고수익형 투자가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를 몰고 온 주범으로 꼽히면서 대형 은행들에 대한 정치권과 여론의 압박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돼 왔다.
정부와 야당 지도자가 연일 나서 국민 세금으로 버티고 있는 은행들이 과거의 ‘보너스 잔치’ 관행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데 대해 연일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영국 금융 산업, 나아가 글로벌 금융 판도를 주도해 온 대형 은행의 CEO들이 줄줄이 의회 증언대에 앉았고 과거 무모한 투자 관행에 대한 이들의 사과 발언은 다음날 아침 신문의 제목을 장식했다.
<YONHAP PHOTO-0043> A demonstrator wears a placard during a protest outside the Royal Bank of Scotland building in the city of London March 5, 2009.   REUTERS/Andrew Winning (BRITAIN)/2009-03-06 00:50:05/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 demonstrator wears a placard during a protest outside the Royal Bank of Scotland building in the city of London March 5, 2009. REUTERS/Andrew Winning (BRITAIN)/2009-03-06 00:50:05/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연명하면서도 ‘제몫 챙기기’에만 바쁜 은행권 CEO들에 대해 영국인들의 들끓는 분노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은 RBS의 CEO 프레드 굿윈 사건이다.

이번에 보너스 포기를 선언한 RBS의 스티븐 헤스터 CEO의 전임자였던 프레드 굿윈은 정부 구제금융 이후 물러난 이 은행의 전직 CEO였다. 지난 2000년 이후 RBS의 CEO를 맡아 8년간 이 은행의 기록적 성장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지난 2008년 영국 기업 역사상 최고 손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40억 파운드(약 43조 원)의 손실을 내고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가 70만 파운드(약 12억6000만 원)가 넘는 연금을 보장받고 사임을 발표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영국 정치권과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프레드 굿윈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상당액의 연금을 선불로 챙겨 퇴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 부실 은행에 공적자금을 쏟아 넣은 정부가 가장 앞장서서 전직 CEO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재무장관과 총리가 잇따라 나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부도덕한 경영자’의 연금을 회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부분의 여론도 이에 가세해 일부 은행권 CEO의 ‘먹튀’식 관행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굿윈은 ‘합법적 계약’에 의한 연금 지급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여론에 맞섰다.

거듭된 진통 끝에 RBS 경영진이 나서 프레드 굿윈과 협상을 벌여 상당액의 연금을 삭감하는 것으로 논란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국 사회가 일부 은행 CEO들의 부도덕한 관행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지난해 초 벌어진 이 사건 이후에도 시중 대형 은행들의 보너스 관행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중도 좌파 성향 일간지 ‘가디언’이 지난 2월 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76%가 은행 CEO의 보너스에 상한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뿐만 아니라 응답자의 59%가 은행권 보너스에 대해, 이른바 ‘횡재세(windfall tax)’라고도 불리는 초과 이윤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60%는 은행권뿐만 아니라 사모 펀드 운용 회사 경영자 등에도 유사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금융권 보너스 관행에 대한 시중의 여론은 ‘AIG 파문’ 등 비슷한 일을 겪은 미국 금융권과 비교해서도 훨씬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내각책임제 아래서 정치인들이 금융권 규제와 관련해서도 더욱 직접적인 목소리를 표출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 있는 정부로서도 이런 여론의 분노에 어떤 식으로든 화답해야 할 다급한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지난해 말 노동당 정부는 올해 예산안을 발표하면서 2만5000파운드(약 4500만 원)가 넘는 보너스에는 50%를 중과세하는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동시에 정부는 대형 은행들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대출에 지나치게 인색하다며 연일 이들 금융 수요자에 대한 대출을 독려하고 나섰다.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영국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그동안 대형 은행들의 대출 문턱이 지나치게 높다고 불만을 나타내 왔다.

은행들은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 대출 목표액까지 발표하며 정부 쪽 분위기 맞추기에 나섰지만 이들 은행들이 이 목표액을 모두 맞추리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최근 들어 RBS와 로이즈 등 영국 대형 은행들이 2009년 실적 발표를 앞두고 잇따라 CEO들의 보너스 포기 선언을 내놓은 것도 이런 부정적 여론에 또 한 번 휩싸일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전히 상당한 규모의 당기 순손실이 예상되는 2009년 실적 발표를 앞두고 고액 보너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다시 고조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일단 이러한 상황을 피해가자는 것이다.

공적자금 회수 위해 주가 올리기 고민

그러나 정부 처지에서도 무작정 은행 경영진에 대해 긴축과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1170억 파운드(약 210조 원)나 되는 천문학적 예산을 은행권 구제금융에 쏟아 부은 정부로서는 하루 빨리 이 은행들의 주가를 올려 시장에 되파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친기업 정책을 펼쳐 온 야당인 보수당도 올 상반기 총선을 통해 집권하면 공적자금 부담을 진 일반 국민들이 은행 주식을 쉽게 사들일 수 있도록 세제 혜택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게다가 노동당과 보수당을 불문하고 이미 빨간불이 켜진 재정 적자 해소를 거시 경제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터에 유능한 CEO를 끌어들여 은행의 실적을 올려야만 이들 은행들을 제값 받고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이 모를 리 없다.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CEO들에게 어느 정도의 고액 연봉과 성과급 연동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은행권의 ‘보너스 잔치’ 관행에 여야를 불문하고 쐐기를 박고 나선 영국 정치권이 CEO들의 잇따른 보너스 포기 선언 이후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