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르네상스의 성공 조건

현재 한국은 경제 규모(명목GDP) 약 1조 달러에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내외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세계은행의 통계를 기준으로 할 때 경제 규모는 세계 15위, 1인당 국민소득은 인구 4000만 명 이상 국가 중 8위에 해당된다. 196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이 채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고 필리핀보다 가난한 국가였던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이다.한국이 후진국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장면들 중에는 섬유 공장의 여공들이 있다. 소위 전통 제조업이라고 불리던 섬유·의류·신발 등의 경공업은 그렇게 한국 경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이 시작되면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정책과 함께 경제정책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전통 서비스업 제품 중심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었다. 특히 이후 중화학공업이 점차 부상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통 서비스업이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산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부터 중화학공업과 정보기술(IT) 산업이 국내 생산은 물론 수출 부문에서도 빠른 두각을 보이면서 전통 서비스업의 위상은 급격하게 축소됐다.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섬유·의류·가죽·신발 제품의 생산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달하기도 했지만 2008년 현재 4% 내외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현재의 선진국들도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와 같이 전통 제조업이 사양화되는 경험을 겪었다.그러한 전통 제조업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높아지는 생산비용 때문이다. 즉, 전통 제조업에 속하는 많은 업종들의 주된 경쟁력은 가격인데,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임금 등 제조 원가가 크게 상승하게 된다. 그러한 비용 상승분을 반영해 판매 단가를 높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시장에 새로 진입한 중국 등 후발 공업 개도국 제품들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점차 전통 제조업 내 기업들이 퇴출되거나 생산 시설이 해외로 이전되는 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어찌 보면 불가항력적이어서 ‘대세’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우리나라 전통 제조업의 빠른 쇠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상당수 선진국들에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통 제조업이 쇠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한국의 전통 제조업 수출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5년 16%에서 2006년 4%로 크게 하락한 반면 프랑스의 전통 제조업 수출 비중은 같은 기간 6%에서 5%로 하락했지만 한국보다는 높은 수출 비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는 17%에서 13%로 오히려 한국보다 전통 제조업 수출 비중이 크게 높다. 이 두 나라의 특징은 짐작하다시피 의류·가방 등의 제품에 유명 브랜드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도 명품 브랜드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 명품 브랜드를 가진 기업이 나라 전체를 먹여 살릴 수도 있다.전통 제조업을 포기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경제발전으로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레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최근 10여 년 동안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면 산에 갈 때 걸치는 옷이나 집에서 입고 다니는 옷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당시 등산화도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전문 산악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은 소가죽으로 만든 등산화였다. 그나마 유일한 등산 장비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색의 등산 양말이 전부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산에 가보면 등산복과 등산화는 필수이고 기능성 소재로 만든 고가의 유명 브랜드 제품을 입고 신지 않은 사람이 없다. 고작 몇 시간 오르고 말 것인데도 말이다.최근 전통 제조업에 또 다른 기회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환경문제다. 요즘 일간지의 생활·건강 면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거의 많은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피부병인 아토피다. 그 원인은 주거 환경·음식·의류·수질 등 여러 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그 덕분인지 합성섬유보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의류가 각광 받고 있다. 수년 전 모시로 만든 내의가 인기를 끌었던 것도, 작년 친환경 유기농 목화를 사용한 오가닉(organic) 제품이 한 달 만에 재고가 바닥난 현상 등도 마찬가지다.더 이상 사양산업이 아닌 고부가가치산업이 될 수 있는 전통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전통 제조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산업 정책은 언제나 중후장대의 중화학공업이나 일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기에 가끔 발견되는 전통 제조업에 관련된 정책들마저도 중소기업 경영 안정화 대책인지 산업 정책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전통 제조업은 안 된다는, 또는 사양산업이라는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그러나 전통 제조업 내의 옥석을 가려 육성해야 할 부문과 그렇지 않은 부문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앞에서 열거한 전통 제조업의 외부 악조건들 외에도 내부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영세성과 비효율성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형화가 필요하다. 특히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의 경우 신속성이 보장되고 자원 낭비가 적은 산업 합리화 유도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이에 해당되는 업종이나 기업들에 대해 사업 전환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거나 생산비용이 저렴한 개도국으로 시설 이전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또한 전통 제조업의 연구·개발 투자 확대를 유도해 기술 경쟁력에 우위를 가져야 한다. 한국의 경제발전 단계를 고려해 볼 때 더 이상 가경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대신 기술·품질·디자인 등의 비가격 경쟁력을 높여나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구·개발 투자 확대를 통한 경쟁력 있는 고기술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에 각광 받는 기능성 섬유 소재 등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전통 제조업 내에 속한 대다수의 기업들은 중소기업이다. 따라서 산·학·연 공동 기술 연구의 확대, 개발된 원천 기술에 대한 관리 등 정부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브랜드 육성도 빼놓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소비자들은 가방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구찌라는 상표를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명품 가방이나 의류는 몇 백만 원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중형차 한 대 가격에 해당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그 명품들 대부분이 개도국들에서의 하청 생산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같은 디자인과 같은 품질을 가졌더라도 브랜드가 찍힌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의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다. 브랜드가 곧 가치라는 경영학의 명제를 가장 확실히 나타내고 있는 시장이 명품 시장인 것이다.마지막으로 기업들의 적극적인 자세도 요구된다. 현재 어려운 기업 사정이 사양산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혀 없을 것 같은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도 필요하고 새로운 시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강의 기적, 세계가 경이롭게 생각하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바로 1960년대와 70년대 전통 제조업을 일구어 낸 기업가 정신에서 비롯됐다. 이제 전통 제조업이 다시 우리의 주력 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 같은 기업과 기업가의 도전과 모험정신이 필요하다.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기간산업실장 juwon@hr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