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의 역사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수입 대체품 생산에서 한걸음 나아가 외화를 벌 수 있는 수출산업 육성으로 전략을 바꿨다. 국내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세일즈맨을 선발해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유명 백화점을 돌아보며 한국이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을 알아보도록 했다.

이들 세일즈맨은 아무리 해외시장을 둘러봐도 적당한 물건을 찾을 수 없어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흑인들이 미국 백화점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한 곱슬머리로 머리 손질이 어려운 흑인 여성들이 가발을 사려고 기다리는 줄이었다.

“머리카락은 잘라도 다시 자란다. 게다가 한국 여성의 머리카락은 매끄럽기로 소문나 있으니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한국의 가발 수출이 시작됐다. 1964년 최초로 가발을 수출해 1만4000달러를 벌었다.

다음 해에는 중국산 가발의 수입이 금지되면서 한국의 가발 수출액은 무려 155만 달러어치에 달했다. 정부는 가발 기능 양성소까지 세우며 가발 산업을 지원했다. 1970년대 초까지 가발 수출액은 총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한국의 주력 산업이었다.

‘삼백산업’으로 전쟁의 폐허 극복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의 제조업은 싼 노동력에 의존하는 경공업 위주일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국내에서 가장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업은 해외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산업이었다. 밀·원면·원당(설탕의 원료) 등 원조를 통해 수입된 원료를 가공한 완제품이 모두 흰색이어서 이를 가공하는 제분·면방직·제당 공업을 삼백(三白)산업이라고 불렀다.

한편 삼백산업을 필두로 한 ‘3F 정책’이 함께 시행됐는데,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자금(Fund)·에너지(Fuel)·비료(Fertilizer)를 마련하기 위해 산업은행을 만들고(1954년), 석탄산업철도(1955년), 충주 비료공장(1961년)이 차례로 만들어졌다. 산업의 기본이 되는 화력발전소(서울 당인리, 마산화력, 삼척)가 1956년 완공됐고 연간 20만 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문경 시멘트 공장이 1957년 완공됐다.

이후 한국은 제1, 2차 경제개발계획(1962~71년)을 통해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주요 생활필수품을 국내에서 생산하게 되면서 수입을 줄였고 섬유·합판·가발·신발 등 경공업 제품을 생산해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또 제철·석유화학·시멘트 등 일부 중화학공업 부문의 생산에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며 한국 경제의 성장세는 둔화되기 시작했고 물가 상승과 국제수지 악화라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1970년대 세계시장은 중화학 제품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었지만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선진국에서는 일이 힘든 중화학공업의 노동력 확보가 어려웠고 공해 문제로 시설을 쉽게 늘리지 못했다. 따라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 획기적으로 수출이 늘 가능성이 있었다.

정부는 1972년 말 유신헌법을 발효했고 이어 1973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이 이뤄졌다. 중화학공업화는 먼저 산업 전반의 성장을 이끌어내는데 효과가 크고 부가가치가 높으며 국제적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이 큰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화학이 6대 중화학공업으로 선정됐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철강·자동차·조선·석유화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해 1970년대 초에 40% 미만이었던 중화학공업화 비율이 1979년 말에는 50% 이상이 됐다. 또한 중화학공업화 비율이 높아지면서 수출 상품의 구조도 바뀌기 시작했다. 개발도상국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중화학공업화를 예정보다 빨리 달성해 한국은 1977년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의 시대를 맞이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하기 직전인 1961년만 하더라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 125개국 중 101번째였다.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의 집중적 육성으로 한국 경제의 산업구조가 바뀌었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개발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컬러TV 방송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80년 12월 1일 수출의 날 기념식 실황 중계부터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컬러TV가 생산된 것은 이보다 한참 전이었다. 1974년부터 한·일 합작회사인 한국나쇼날은 컬러TV를 생산해 전량 수출했고 1977년에는 금성사와 삼성전자, 1978년에는 대한전선도 컬러TV를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치 풍조를 조성하고 국민 위화감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컬러TV 방영을 막았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이른바 ‘3S(Sports·Screen·Sex) 정책’으로 컬러TV가 빛을 본 것이다.

컬러TV 방영으로 전자산업 부흥

이를 계기로 1981년 3월 ‘전자산업육성방안’이라는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이 보고서에는 가전제품 중심의 전자 산업구조를 반도체·전자교환기·컴퓨터 등 3대 전략 품목 중심으로 바꾸면 전자산업은 3배 이상 성장이 가능하고 1986년까지 생산 105억 달러, 수출 70억 달러를 이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참고해 1981년 전자산업진흥법이 개정됐다.

시장 상황이 바뀌자 국내 최대 재벌이었던 현대가 전자 업계에 뛰어들었고 대우그룹도 전자 분야 사업을 확충했다. 1983년 현대그룹은 미국 실리콘밸리 내에 모던일렉트로닉시스템을 설립했고 경기도 이천에 종합전자공장을 건설하며 컴퓨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우전자는 대한전선의 가전사업부를, 대우통신은 대한통신·오리온전기·대한콘덴사를 흡수해 규모를 키웠다.

전자산업에 대한 투자는 비약적으로 늘어나 1980년 911억 원이었던 투자는 4년 만인 1984년 8545억 원으로 무려 9.5배나 증가했다. 한편 전자산업과 함께 반도체 사업도 차세대 육성 사업으로 떠올랐다.

1980년 경제 부처와 경제학자들은 국제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과학기술부·상공부·삼성·금성 등 관련 업계는 전자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도체 산업을 키우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82년 ‘반도체공업육성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983년에는 ‘정보산업 및 반도체공업육성위원회’로 발전해 미래 산업의 주축이 될 정보와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게 됐다.

1990년대 컴퓨터와 통신의 발전은 세계적인 디지털 혁명을 이끌었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 1995년 정보화촉진기본법이 제정됐다. 이후 한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1995년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무궁화 1호를 발사했고 1996년 세계 최초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전화 상용 서비스가 시작됐다.

IT 산업 부문의 생산은 2002년 186조 원에서 2007년 267조 원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한국 IT 산업은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반도체·이동전화·컴퓨터 같은 하드웨어와 기기 분야의 기술력이나 사용자 비율 등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소프트웨어 분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IT 산업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기여도는 지난 2007년 5.1%에서 2008년 2.2%로 하락했고 수출 비중도 35.0%에서 31.1%로 하락했다. IT 산업의 생산액 성장률 역시 지난 2004년 이후 GDP 성장률과 함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성장세도 정보통신 기기에 집중돼 있을 뿐 정보통신 서비스와 소프트웨어의 성장 속도는 여전히 더딘 실정이다.



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