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담배를 피우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아들이 피운 담배꽁초를 치워 주시고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식을 믿는다는 것인데, 담배를 또다시 피운다면 아버지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아버지에 대해 깊이 기억에 남는 일은 고2 때 사건이었다. 비교적 모범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춘기의 호기심 때문인지 처음으로 내 방에서 몰래 담배를 피운 날이었다. 뒤처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는데, 새벽녘 잠결에 문이 슬며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머리맡 잉크통에 두었던 담배꽁초를 아버지가 치운 것이 아닌가.이제나저제나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선 하루종일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날 저녁 내가 먼저 아버님께 이실직고했다. 아버지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 삼가는 것이 좋다는 말씀만 하실 뿐 별다른 야단을 치지 않으셨다. 그날 이후 담배를 피우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아들이 피운 담배꽁초를 치워 주시고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식을 믿는다는 것인데, 담배를 또다시 피운다면 아버지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아버지는 과묵하신 편으로 자식들이 한두 번 잘못해도 즉시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었다. 그것이 나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습관을 갖도록 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조급하게 판단하기보다 기다려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몰락한 양반가에 태어나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셨지만 독학으로 배운 실력으로 당시 신문의 한자를 거의 모르는 것이 없었던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옥편을 찾으면서 신문을 보시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옥편을 찾던 나도 한자 시험엔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떠한 것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본을 직접 보여 주신 것 같았다.말로 훈계하거나 꾸짖는 법이 별로 없었던 아버지가 어쩌다가 식구들을 불러 말씀하실 때에는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였다.아버지의 가르침은 거의 당신이 오랫동안 실천하는 습관을 통한 것이었다. 수십 년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앞뿐만 아니라 동네 골목을 청소하셨던 모습이나, 주변의 경조사가 있을 때 궂은일을 도맡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 온 자식들은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장성해서 자식들을 키워보니 말을 앞세우지 않고 자식들에게 행동으로 본을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다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버지가 중년 후반에 일거리를 갖지 못했던 점이었다. 공장을 경영하다가 그만두시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이 잘 되는 바람에 경제권을 잃은 아버지는 상당 기간 술을 많이 드시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아버지의 후반생(後半生)이 조금 더 풍성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요즘 50대 시니어 계층의 창업과 일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 정책 입안에도 참여하게 됐으니 아버지가 물려주신 과제가 내게는 훌륭한 유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친구들이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할 때 나는 내가 선택한 사업의 현장에서 수많은 부침을 겪으며 힘들게 경험을 쌓아 왔다. 최근 조기 퇴직이 일반화되면서 나는 창업 분야의 전문가로서 퇴직하는 50대가 제2의 삶을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있으니 이 역시 기다림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아버지는 내가 2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평범한 삶을 사셨던 분이시기에 문상객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뵙는 분들이 그토록 많이 찾아와 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내게 해 주었을 때 아버지께서 말없이 실천해 온 삶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됐다.내가 직면한 문제나 인간관계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긴 호흡을 갖고 조금 더 기다리면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습관은 내가 오늘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고 있다. 르호봇 비즈니스인큐베이터 대표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쪽방’ 사무실에서의 경험을 살려 1인 기업과 소호 기업에 필요한 비즈니스센터 및 창업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한국소호진흥협회장을 겸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