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태풍의 핵’ 태블릿PC
태블릿 PC를 처음 무대에 등장시킨 주인공은 흥미롭게도 ‘소프트웨어의 황제’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다. 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2001년 1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추계 컴덱스 쇼에서 게이츠 전 회장은 1만5000명의 청중 앞에 ‘펜과 종이 노트를 들고 다니는 것 같은 유연성과 이동성을 갖춘 새로운 세대의 PC’를 처음 선보였다. 그는 얇은 판(板, tablet) 형태를 한 이 혁신적인 PC를 직접 시연하며 “태블릿은 향후 5년 내 가장 각광받는 PC 형태가 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언’은 빗나갔다. MS는 수년간 이 분야에 공을 들였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지난해 전 세계 시장에서 팔려나간 태블릿 PC는 대략 120만 대 수준으로 추정된다. 전체 PC 판매량의 0.4%에 불과한 미미한 수치다.하지만 최근 정보기술(IT) 업계의 또 한 명의 거인이 태블릿 PC를 선택하면서 게이츠 전 회장의 예언은 늦었지만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1월 28일 스티브 잡스 애플 회장이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신제품 ‘아이패드’를 전격 공개하면서 나타난 놀라운 반전이다. 아이팟과 아이폰으로 IT 산업의 ‘게임의 법칙’을 단숨에 바꿔놓은 그가 세 번째 아이템으로 태블릿 PC에 주목했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과연 애플이 손을 대면 죽은 태블릿 시장도 살아날 수 있을까. 기존 태블릿 PC의 실패 요인은 여러 가지가 꼽힌다. 200만 원을 훌쩍 넘는 비싼 가격에 필기 입력 방식은 정확성이 떨어져 오류를 내기 일쑤였다. 부족한 배터리 지속 시간과 무선 인터넷 접속 인프라 부재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노트북 대신 태블릿 PC를 써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사이 이런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부품 가격은 하락했고 터치 기술의 빠른 발전 덕분에 입력 방식도 크게 개선됐다. 통신 인프라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성공을 위한 기반은 어느 정도 갖춰졌고 이 타이밍을 애플은 정확하게 잡어낸 셈이다.기존 제품을 시대에 뒤떨어진 제품처럼 보이게 하는 스티브 잡스의 능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애플의 태블릿 PC ‘아이패드’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아이팟이나 아이폰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가로 18.97cm, 세로 24.28cm로 A4 용지보다 약간 작은 크기에 강력한 멀티 터치 기능과 부드러운 사용자 환경(UI)을 탑재했다. 배터리 지속 시간은 동영상 재생 기준 10시간을 넘어섰다. 가격도 499달러(최저 사양)로 국내에 출시될 경우 60만 원 내외에서 구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애플의 공격적인 행보에 자극받은 경쟁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태블릿 PC의 원조 격인 MS는 지난 1월 초 세계 최대 PC 회사인 HP와 공동 개발한 태블릿 새 모델을 한발 먼저 선보이며 애플에 견제구를 던졌다. MS가 준비 중인 다음 카드는 듀얼 디스플레이(이중 화면)를 장착한 야심작 ‘쿠리어’다. 양쪽에 7인치 화면을 배치해 책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새로운 방식의 태블릿 PC다. 아이패드가 발표된 지 1주일 만에 구글판 태블릿 PC 디자인이 인터넷에 공개되기도 했다. 구글은 아직 태블릿 PC 개발을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크롬 운영체제(OS)를 적용한 제품을 올해 안에 내놓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최고의 IT 기업들이 모두 속속 경쟁에 뛰어들고 있지만 이들이 아이패드의 독주를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애플의 진정한 위력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강력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애플은 아이팟과 아이폰을 쓰며 독특한 ‘애플 스타일’에 익숙해진 두터운 사용자 층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이패드는 아이폰을 늘려 놓은 ‘빅팟(Big pod)’에 불과하다는 비난은 핵심을 빗나간 것이다. 애플은 아이패드와 함께 아이북스토어를 공개함으로써 음악(아이튠스토어)→ 응용 프로그램(앱스토어)→ e북(아이북스토어)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콘텐츠의 제국을 완성했다.스티브 잡스의 놀라운 점은 업무용 기기로 포지션돼 왔던 태블릿 PC를 엔터테인먼트 도구로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하드웨어의 성능 경쟁보다 사용자들이 새로운 기기로 즐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아이팟과 아이폰 신화가 남겨준 핵심적인 교훈이다.아이패드는 매력적인 e북 리더이자 음악 플레이어, 동영상 플레이어, 게임기이며 이 모두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패드 출시로 e북(아마존)과 게임기(소니·닌텐도) 업체들이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전통 미디어 기업들은 아이패드의 탄생에 큰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인터넷 시대 출현 이후 줄기차게 내리막길을 걸어온 종이 매체들은 새로운 수익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들은 아이패드 등장을 계기로 해적판과 공짜 콘텐츠의 범람에 맞서 새로운 유료 모델이 정착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애플의 태블릿 PC는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게끔 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데 충분히 매력적인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와 패션 잡지 에스콰이아를 소유한 언론 그룹 허스트, 그리고 하퍼스콜린스, 맥그로힐 등 출판사들은 이미 애플과 콘텐츠 공급 협의에 들어갔다.아이패드의 국내 상륙 시기는 다소 유동적이다. 애플은 3월 초 국내 판매가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초기 물량 부족, 한글 지원 문제, 한글 콘텐츠 부족 등으로 출시 시기가 당초 전망보다 늦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국내 업체들도 태블릿 PC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TG삼보컴퓨터는 한글과컴퓨터(한컴)와 손잡고 이르면 올 1분기 중 아이패드에 대항할 태블릿 PC를 내놓을 계획이다. 이 제품에는 한글 문서와 워드·엑셀·파워포인트와 같은 MS 오피스 문서는 물론 PDF도 지원하는 한컴의 오피스 솔루션인 ‘싱크프리’가 탑재된다. 대기업 중에서 삼성전자는 다소 신중한 분위기인 반면 LG전자는 하반기 제품 출시를 목표로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이패드가 국내 IT 업체에 미칠 영향은 양면적이다. 아이패드에 들어갈 플래시메모리와 프로세서, 액정표시장치(LCD)를 대부분을 국내 업체들이 공급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하이닉스·LG디스플레이 등이 대표적인 수혜 종목으로 꼽힌다.물론 아이패드가 장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패드는 카메라도 없고 확장 메모리 슬롯도 없으며 기존 PC에 싱크해야 한다. 국내에서 인터넷 뱅킹이나 온라인 쇼핑에 필수적인 액티브X를 지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패드에 주목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이동 중에 아이패드를 가방에 넣고 아이폰(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집이나 일터·공원에서 쉴 때는 아이패드를 꺼내 보다 큰 화면을 통해 최적의 환경에서 웹서핑과 각종 콘텐츠를 즐기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옳다면 IT 산업의 구도는 또 한 번 요동칠게 분명하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