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뒤흔드는 ‘차이완’ 태풍

1949년 분단 이후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요즘처럼 좋았던 적은 없다.60년간 고수한 직교역 금지 등 ‘3불통(三不通)’ 원칙을 폐기한데 이어 양안 경제권을 하나로 묶는 ‘중화판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러한 두 나라의 ‘경제 밀월’은 중국에 수출하는 주력 품목이 대만과 겹치는 한국에는 큰 충격이다.특히 중국의 거대 시장과 생산능력, 대만의 첨단 기술이 결합하는 ‘차이완(Chaiwan:China+Taiwan)’ 효과로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등 동북아 하이테크 산업의 역학 구도는 벌써부터 요동치고 있다.지난해 중국 시장에서 한국과 대만의 LCD 패널 시장점유율이 뒤바뀌는 이변이 벌어졌다. 2008년 1분기 한국은 점유율 46.2%로 1위, 대만은 35.6%로 2위를 차지했지만 2009년 1분기에는 대만이 56.5%로 1위로 올라섰고 한국은 29.7%를 기록하며 2위로 내려앉았다. 2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은 시장점유율을 일부 회복했지만 50%대를 질주하는 대만 기업에는 훨씬 못 미쳤다. 중국 정부가 경기 활성화 차원에서 시작한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의 반사이익을 상당 부분 대만 LCD 기업들이 가져간 셈이다.대만의 시장점유율이 1년 만에 갑자기 20.9%포인트나 뛴 것은 그 사이 대만과 중국 관계가 급격히 호전됐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취임한 ‘친중파’ 마잉주 대만 총통은 ‘3통(직항·직교역·서신왕래)’ 정책을 전면에 내걸고 양안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중국도 이러한 변화에 호응해 LCD를 포함한 대규모 구매 사절단을 대만에 파견하면서 대만 업체들의 중국 시장점유율이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이는 앞으로 ‘차이완’ 태풍이 몰고 올 엄청난 변화의 서막일 뿐이다. 당장 대만의 급부상으로 밀려난 한국 LCD 업체들은 중국 현지 생산 기지 건설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술 유출을 우려해 자국 내 생산을 고집해 온 샤프도 중국 패널 공장 설립 경쟁에 뛰어들었다. 과거 전통 제조업체들이 중국으로 대거 생산 라인을 옮기면서 벌어졌던 산업 공동화에 버금가는 하이테크 중심의 ‘제2 산업 공동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물론 대만과 중국의 교역 관계가 하루 이틀 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중국은 대만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경제협력 체제가 정보기술(IT) 제품 등 하이테크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 정부는 이른바 ‘3통’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반도체와 LCD 분야에 대해서만은 중국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분위기로 볼 때 이들 분야도 대만 기업의 중국 본토 진출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반도체 업계의 요구에 따라 대만 정부가 이들의 중국 투자를 허용할 방침이라는 보도가 벌써 나오고 있다.그렇게 되면 첨단 기술을 오랫동안 갈망해 온 중국은 날개를 다는 격이 된다. 정동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국 반도체·LCD 산업의 부상과 대응’ 보고서에서 “통신장비 등 일부 분야에서 중국의 IT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며 “아직 상당한 격차가 유지되고 있는 분야는 투자 규모가 크고 핵심 기술을 선진 기업에 의존하는 반도체와 LCD”라고 지적했다. = 지난 1월 26일 베이징의 국빈관인 댜오위타이에서 중국과 대만 대표들이 마주 앉았다. ‘양안(兩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체결을 위한 역사적인 첫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날 양국 대표들은 그동안 진행된 양안 간 ECFA 공동 연구 결과를 평가하고 협정의 정식 명칭과 기본 구조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ECFA는 중국과 대만 간에 거래되는 상품과 용역에 대한 관세를 대폭 낮춰 무역과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게 핵심이다. 이 협정이 체결되면 양안 경제는 사실상 하나로 묶이고 대만의 중국 시장 진출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ECFA는 2008년 5월 이후 하루가 다르게 급진전되고 있는 양안 관계 개선의 ‘화룡점정’에 해당한다. 이제 양국 간 교역과 교류를 가로막던 걸림돌은 대부분 사라졌다. 3통 정책 시행으로 대만에서 컨테이너를 실은 선박들은 직항로를 통해 중국 본토 68곳 항구를 자유롭게 오간다. 대만 번호판을 단 차량의 내륙 운행도 가능해졌다. 중국인들의 대만 관광도 크게 늘어 지난해 대만을 찾은 중국 여행객은 97만2000명으로 전년보다 195%나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 베이징과 대만을 연결하는 고속철도는 물론 양안을 연결하는 해저터널 건설도 구체화되고 있다.해저터널 프로젝트는 대만과의 경제협력 시범지구인 중국 남부 푸젠성 동남단의 섬 핑탄다오에서 대만의 IT 단지 신주까지 해저 126km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 해저터널은 중국 국무원이 2005년 승인한 중국 베이징과 대만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길이 8만 5000km의 징타이 고속도로 계획의 핵심 부분에 해당한다. 중국은 2030년까지 2조 위안을 이 프로젝트에 투입하기로 했지만 대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중단됐다가 최근 양안 경제 통합 움직임이 탄력을 받으면서 재추진되는 것이다.대만에 ECFA는 생존을 위한 승부수라고 할 수 있다.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수출 주도형 국가다. 한때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로 각광 받았지만 한국의 약진과 국제무대에서의 고립으로 상대적으로 밀려난 모습으로 비쳐져 온 게 사실이다. 현재 대만의 수교 국가는 중앙아메리카 국가를 중심으로 한 23개 나라에 불과하다. 최근 지역 간 경제통합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세계경제 체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수출 경쟁력에서 뒤처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대만 경제계에 팽배해 있다.이런 상황에서 ‘중국·아세안 FTA’ 발효로 최대 수출·투자 시장인 중국에서마저 수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대만 정부는 ECFA가 체결되면 석유화학과 기계, 자동차 부품 등을 위주로 대중국 수출이 제고돼 GDP가 1.4%포인트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반대로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대만 경제의 변두리화와 산업 유출이 가속화되면서 GDP는 1%포인트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ECFA는 한·중 FTA, 한·일 FTA, 한·중·일 FTA 등 이 지역의 경제 통합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양안 관계 밀착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중국 시장에서 한국과 대만은 치열한 경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2008년 중국 수입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과 대만의 대중국 수출품 상위 50개 중 34개 품목이 서로 겹친다. 당장 ECFA가 체결되면 한국 LCD는 5%의 수입관세를 물어야 하지만 대만 LCD는 무관세 혜택을 받아 경쟁에서 불리해진다.이 지역의 또 다른 경쟁자인 일본은 대만과 중국의 관계 밀착을 역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 대만 기업과 직접 경쟁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대만과의 투자 협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상공회는 최근 대만 진출 38년 만에 최초로 백서를 발표했으며 ECFA 지지와 일본·대만 FTA 추진 의지도 분명히 하고 있다. = 동북아 하이테크 시장에서 한국과 일본, 대만은 중국 시장을 놓고 미묘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은 LCD와 D램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만은 반도체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산업에서는 세계 1위며 LCD에서도 강한 저력을 갖고 있다. 일본 역시 첨단 기술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대만은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프리미엄 제품에 집중하고 원가를 절감할 수 있도록 아웃소싱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본 엘피다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따라잡기 위해 중국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일본 소니와 파나소닉은 TV 분야에서 경쟁 관계인 한국 LCD 패널 업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대만 LCD 업체들을 활용함으로써 이득을 얻고 있다. 여기에 중국(완제품)과 대만(부품)의 결합이라는 강력한 ‘차이완’ 변수가 등장하면서 파란이 일고 있다.지난 1월 20일 중국 TV 업체들은 AUO, CMO, CPT 등 대만 3대 LCD 업체와 53억 달러 규모의 LCD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대규모 구매단이 대만을 방문해 44억 달러어치의 구매 계약을 맺은 것에 이어 두 번째다. 대만 업체들은 작년 이 계약에 따라 34억 달러어치 1800만 장의 LCD를 중국 TV 업체에 공급했다. 이는 당초 약속한 44억 달러에는 못 미치는 것이지만 금융 위기 여파로 대만 업체의 생산 라인이 풀가동되지 못하면서 차질이 빚어졌다는 설명이다.전문가들은 이러한 중국과 대만 기업들의 연이은 LCD 대량 구매를 중국 TV 업체와 대만 LCD 업체가 한국 TV·LCD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연합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중국 LCD TV 시장은 2010년 유럽을 제치고 2011년에는 미국마저 추월해 세계 최대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LCD 국공(國共) 연합’은 향후 한국 기업들이 중국 LCD TV 내수시장을 공략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언론들은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 강화는 순전히 시장 원리에 따른 것”이라며 “중국 기업들이 대만의 경쟁력 있는 고품질의 IT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한다.대만과 한국, 일본 업체들의 경쟁 구도 재편으로 가장 혜택을 보는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대만을 끌어안음으로써 오랜 숙원인 첨단 기술과 생산 설비 확보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차이완 효과가 현실로 나타나자 한국과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기술 유출 우려로 꺼리던 중국 현지 공장 건설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이 중국에서 조립 등 저급 기술이 필요한 작업만 수행했지만, 이제는 중국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짓는 것이다.지난 2005년 중국 장쑤성 우시에 반도체 공장을 세운 하이닉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이닉스는 세계시장에서는 삼성전자에 밀려 2위 자리에 있지만 중국에 D램 공장을 비롯한 막강한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어 중국 시장에서는 점유율 40%대로 압도적인 1위다. 하이닉스는 중국 내에 고급 12인치 웨이퍼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D램 업체다. 현재 중국 우시 공장은 하이닉스 D램 생산의 50%를 차지한다.주요 LCD 업체들이 중국 투자에 몸이 달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지금까지 중국에 7~8세대급 LCD 공장 투자 의향을 밝혔거나 투자를 진행 중인 기업은 한국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일본 샤프, 대만 AOU와 CMO 등 외국계 기업 5개와 BOE, IVO, TCL 등 중국 업체 3개 등 모두 8개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과잉투자 우려 때문에 오히려 이 중 일부만 승인해 줄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