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 당진 일관제철소 현지 르포

현대제철이 지난 1월 5일 30년을 넘게 꿈꿔 온 그룹의 숙원 사업인 ‘일관제철소’ 건설을 마무리했다.철광석을 녹여 만든 쇳물로 제품을 만들어 내는 현대제철 일관제철소는 내년까지 연 생산 2000만 톤 수준의 세계 10위권 철강사로 도약할 계획이다. 경제성장의 새 원동력이 될 현대제철 일관제철소와 국내 최대의 기업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당진군을 찾아가 봤다.지난 1월 14일 오전 현대제철이 있는 충청남도 당진은 포근했다. 이날 아침 서울의 기온은 섭씨 영하 14도로 거리에 서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 때문에 바다에 가깝고 넓은 벌판이 펼쳐진 당진은 당연히 더욱 추울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우중충한 서울을 벗어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당진에 가까워질수록 햇살이 비치며 추위가 점차 잊혀 갔다. 당진 톨게이트를 벗어나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안에 들어서며 현대제철 관계자들을 만나자 단추를 끝까지 채웠던 외투와 친친 둘러 감은 목도리가 다소 민망해질 정도였다.“사람들은 대부분 제철소 근무가 여름이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철소에서 일하기는 겨울이 훨씬 고역입니다. 대부분의 공정이 공장 안에서 이뤄질뿐더러 공장이 워낙 크고 넓어 여름에는 꽤 시원한 편이지만 겨울이 되면 조금만 추워져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예요. 이만한 크기의 건물에 몇 사람을 위해 난방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꼭 근무자들을 위한 건 아니겠지만 국내 대부분의 제철소들이 비교적 따뜻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승희 현대제철 홍보팀 과장은 그간의 고정관념을 이렇게 깨버렸다.1월 5일 현대제철은 제1고로(高爐·용광로)를 가동하며 ‘왕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때부터 이어온 ‘일관제철소’의 꿈을 이뤘다. 일관제철소란 제선·제강·압연의 세 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말한다. 제선은 원료인 철광석과 유연탄 등을 커다란 고로에 넣어 액체 상태의 공정을, 제강은 이렇게 만들어진 쇳물에서 각종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압연은 쇳물을 슬래브(커다란 쇠판) 형태로 뽑아낸 후 여기에 높은 압력을 가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간 국내에서 일관제철소는 정부 정책에 따라 탄생한 포스코밖에 없었다. 순수 민간 기업으로는 현대제철이 최초다.오뚝이 정신으로 무장한 한국 기업가 정신의 상징,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일관제철소 건설은 유일하게 좌절을 안겨준 사업이라고 한다. 중공업 제국을 꿈꾸던 정 명예회장은 자동차와 조선소의 재료 공급을 위해 철강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정부가 포항제철에 이어 제2제철소 설립을 추진하던 1977년 종합제철소 설립 계획안을 냈다. 하지만 제2제철소 건립은 그해 10월 포항제철로 결정됐고 1984년 광양제철소가 완공됐다.그로부터 10년 후 문민정부 시절 정 명예회장은 부산 가덕도에 제3제철소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정부는 철강 공급 과잉이 우려된다며 반대했고 또 한 번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결국 정 명예회장은 1996년 아들인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에게 뜻을 잇게 하고 물러났다. 아버지의 의지를 보아 온 정몽구 회장은 철강 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당시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무려 280만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1997년 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한파로 경남 하동에 예정됐던 제철소 건립은 또다시 무산됐다.다시 10년 후인 2006년 강원산업·삼미특수강·한보철강을 잇달아 인수하며 철강 부문을 강화한 정몽구 회장은 마침내 고로제철소 설립 인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지난 1월 5일 철강 산업의 상징인 고로에 첫 불을 댕겼다. 30년에 걸친 현대가의 의지가 현실이 된 것이다.현대제철 관계자에 따르면 정몽구 회장은 1월 5일 있던 화입식(火入式) 하루 전날인 4일 낮에 당진에 도착해 행사를 기다렸다고 한다. 4일은 전국이 폭설로 마비됐던 날이다. 한국 경제의 거목 중 한 사람인 정 회장이 유례없는 폭설을 뚫고 자회사의 행사에 직접 참석해 함박웃음을 지었던 이유다.“이전에 있던 전기로는 고철이나 외국산 반제품을 녹여 철강제품을 만듭니다. 반면 고로는 기초 재료인 철광석으로부터 직접 철을 생산하는 것이죠.” 안창수 현대제철 홍보팀장은 서울 여의도의 2.5배인 740만㎡ 부지의 한가운데에 높이 110m 크기로 우뚝 서 있는 제1고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고로 생산 방식은 전기로 방식에 비해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고 한다. 먼저 가격 경쟁력이다. 전기로 방식은 재료비가 톤당 40만 원가량 들지만 고로 방식은 재료비가 톤당 30만 원 수준이다. 또 품질 면에서 고로 방식은 여러 종류의 철광석을 원하는 대로 배합해 다양한 품질의 철강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현대제철은 잠실야구장 크기의 보관소에 5개국에서 수입한 15종류의 철광석을 보관 중이다. 안 팀장은 “전기로 방식은 고철 등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어 고품질의 철강 제품을 생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그는 “내년 제2고로가 완공되면 800만 톤 규모의 고급 철강재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며 “기존의 전기로와 합쳐 연산 2000만 톤의 생산량으로 세계 10위권 철강사로 도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최근 현대제철은 각 증권사의 호평을 받고 있다. 주가도 작년 7월 24일 6만1400원을 저점으로 꾸준히 올라 10만 원을 넘보고 있다. 이유는 현대제철이 생산하는 철강 제품의 판로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룹 내 현대·기아자동차다. 현대제철은 당장 고로 가동이 본격화되는 4월부터 현대·기아차의 국내·해외 공장에 공급할 자동차용 철판을 만들 계획이다. 내년 제2고로까지 가동되면 당진 일관제철소에서만 연간 650만 톤의 자동차용 강판을 만들 수 있다.현대제철은 현대·기아차 그룹에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로 현대·기아차그룹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직접 철강을 만들 수 있는 자동차 회사가 됐다. 최근 세계 자동차 업계는 친환경·고연비 차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를 풀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자동차를 만드는데 쓰는 철강 제품이다. 정몽구 회장은 1월 5일 기념사에서 “현대제철이 생산한 고품질의 자동차용 강판을 통해 소재·부품·자동차로 이어지는 최적의 일관 생산 체제를 갖춰 그룹 전체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주위를 둘러보면 알겠지만 모든 작업 라인이 쇳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밀폐형으로 제작됐습니다. 야구장 크기의 철광석 보관소 또한 세계 최초로 돔구장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이승희 현대제철 홍보팀 과장은 현대제철 일관제철소와 여타 제철소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친환경성’을 꼽았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는 고로에 투입되는 제철 원료를 하역·이송·보관하는 시스템이 모두 밀폐형으로 운영되고 있다. 항만에서부터 철광석과 유연탄 등 제철 원료를 밀폐형 연속식 하역기로 하역한 뒤 밀폐형 벨트 컨베이어로 옮겨 먼지와 소음을 차단할 수 있으며 제철 원료를 보관하는 저장고도 돔형의 완전 밀폐형으로 건설됐다. 이 과장은 “다른 제철소처럼 비산먼지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약품을 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수질오염 등 주위 환경오염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2000년대 초반 세계의 축구광들은 모두 이탈리아 프로리그인 세리에A에만 열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세리에A가 인기를 끌었던 원인은 세계 최강팀 AC밀란을 비롯해 인터밀란, 유벤투스 AS로마, 라치오 등 ‘7공주’라고 불리는 7개의 강팀들이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이며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때 쌓인 축구의 노하우가 200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우승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재미있는 사실은 현대제철이 위치한 당진의 경제성장은 앞으로 고로2호기 건설에 9만3000명, 완공 후 운영에 7만8000명에 이르는 고용 유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현대제철을 중심으로 동부제철·휴스틸·현대하이스코·환영철강공업·대주중공업·선진정공 등 7개 철강 관련 대기업들, 즉 ‘철의 7공주’들이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당진이 ‘국내 최대의 기업도시 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라는 각계의 예상도 바로 이들 기업들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 때문이다.당진의 엄청난 경제성장은 늘어나는 인구만 봐도 알 수 있다. 2003년 11만6477명이던 인구는 해마다 2000~4000명씩 느는 추세다. 지난해 말엔 14만1850여 명으로 집계돼 시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 특히 당진읍 인구는 최근 4개월 만에 2000명이 늘어 4만5000명을 넘었다. 당진군청 권석정 주사는 “오는 3월 새 아파트 2200가구가 입주를 시작하면 상반기 중 시 승격 인구 요건인 5만 명을 단숨에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포함해 앞으로 아파트 7000가구 정도가 더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인구가 치솟자 부동산 값도 덩달아 뛰고 있다. 김종현 당진군청 현대제철 지원팀장은 “시청사가 들어설 곳 맞은편 상가가 3.3㎡ 1000여만 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며 “새 아파트 분양가가 760만 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는 “포항에서 온 철강 전문가들이 현지의 집을 팔아도 당진에서 전셋집 구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고 설명했다.지방세 수입 또한 2003년 600억 원에서 2008년 1700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지난해 군에 들어온 세금도 1725억 원 정도로 불었고 올해는 1828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10년 전(399억 원)보다 4.5배 늘어난 액수다.기업도시로서의 당진 발전은 꾸준히 느는 물동량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진군엔 15선석의 부두가 완공돼 한해 3900여만 톤의 화물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연평균 10~20%의 물동량이 늘고 있어 송악부두, 고대부두, 외항 서부두 등에 부두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 공사가 2020년까지 마무리되면 1억500여만 톤의 물동량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물론 당진 지역 경제의 활성화는 단지 철강관련 기업들에 의해서만 이뤄진 건 아니다. 당진군엔 이들 7개 철강 관련 기업을 포함해 종업원 300명 이상이거나 자본금 80억 원 이상의 대기업 10곳이 둥지를 틀고 있다. 또 앞으로 동국제강·중외제약·대한전선 등의 대기업도 이 지역에 공장을 마련할 예정이다. 군 단위 지역으론 이례적인 규모다.지난해 몰아친 국내외 경제 위기 속에서도 크고 작은 기업 194곳이 당진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당진 지역에 있는 기업은 1000여 개에 달한다. 한 당진 군민은 “최근 당진에서 가장 유망한 창업 아이템이 ‘복사기 임대업’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그간 ‘제로’에 가까웠던 복사기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기업들이 당진으로 몰려들고 있는 이유는 입지 조건들이 좋기 때문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대중국 전진기지로서 환황해권 개발 중심에 서 있고 생산품의 수요처 근접성과 교통의 편리성 등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또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과 신도시로의 접근성도 쉬워 고급 인력을 끌어오기에 알맞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교통 역시 편리해 △서해안 고속도로 △당진~대전 고속도로 등 도로망들이 사통팔달로 뚫려 있다. 아울러 조성될 서해산업선 철도, 평택당진항 개발로 물류 편리성까지 갖춘 것도 당진의 장점으로 꼽힌다.한때 당진은 ‘한국의 시베리아’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만큼 산업 시설이 전무하고 주변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진은 제철 사업에 대한 한 기업인의 끈기, 변화를 위한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의 노력, 신흥국 중심의 경제 구도 재편 등에 따른 시대의 변화 등이 어우러지며 국내 최고의 기업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샌드위치론’ 등으로 코너에 몰려 있는 한국 경제의 새 비전은 바로 당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당진= 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 /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