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부는 ‘문화 경영’ 바람

일밖에 모르던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생전 처음 미술관에 가고 대학로 연극을 찾는다. 딱딱하게 굳은 권위적인 표정을 풀고젊은 직원들에게 살가운 문자를 날리기도 한다. 문화 경영은 이제 중소기업에도 필수 조건이다. 문화의 향기를 풍기지 않으면 소비자들은 더 이상 제값을 치르지 않는다.중소기업을 꺼리는 젊은 인재도 잡을 수 없다. 문화는 나이·성별·직급을 뛰어넘어 직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무한 마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중소기업형 문화 경영으로 앞서가는 기업들을 살펴본다.지난 1월 19일 노시청(59) 필룩스 회장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한참 분해하다가 만 목제 앤티크 오르간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노 회장은 “150년 된 영국제 오르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젊을 때부터 겉만 보는 게 아니라 꼭 속을 뒤집어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병기장교로 있던 ROTC 장교 시절 군용 차량과 무기·통신장비를 모조리 분해·결합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제대 후 자동화 전문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노 회장은 “필룩스도 조명기기 회사지만 자동 기계 제작 기술을 사용한다”며 “조명도 결국 주택 자동화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50년 전 영국 오르간은 그 당시 최첨단 기계라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린다.노 회장의 명함에는 직함이 두 개다. 그는 ‘필룩스 회장’이자 ‘조명박물관장’이다. 지난 2004년 경기도 양주시 외곽에 있는 필룩스 본사 내에 조명박물관을 만들어 문화 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에는 등잔·밀랍초·오일램프까지 좀처럼 보기 드문 동서양의 전통 조명기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조명을 테마로 한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다.그도 한때는 권위적이고 경직된 보통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원들은 콘크리트 바닥에서 소음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노 회장은 “저는 제 사업이니까 물불 가리지 않고 뛰었지만 직원들은 얼마나 괴롭고 재미가 없었을까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그를 바꿔 놓은 것은 흥미롭게도 ‘생존’에 대한 고민이었다.“조명을 기능 상품으로 팔아서는 미래가 없다고 느꼈어요. 기능으로 보면 중국 제품이 가격이나 품질 다 따라잡았기 때문이지요. 그들과 똑같이 만들어 팔면 망하는 게 뻔한 상황이었죠. 단순한 ‘조명 회사’가 아니라 ‘조명 문화를 창조하는 회사’로 방향을 잡았어요.”하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문화’만큼 어려운 단어도 없었다. 문화는 오감이 모두 잘 어우러져 작동하는 정밀 기계와 같다. 그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직원들부터 문화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고객을 감동시키는 문화 창조는 불가능하다. 우선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공장을 공원처럼 꾸몄다.2004년 노 회장은 조명박물관도 짓고 직원들과 함께 가을 음악회를 열기 시작했다. 음악회는 외부 오케스트라를 초청하지만 직원들이 직접 무대장치와 음향·조명을 설치해 화려한 ‘라이팅 콘서트’로 꾸몄다. 조명기기 회사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회사 내에 마련한 야외 공연장에서 연 첫해 공연에는 600여 명이 참석했지만 이제는 공연 때마다 3000명 이상 몰려 인근 도로까지 사람이 꽉 들어찰 만큼 인기가 높다. 초청 대상은 주로 고객·대리점·거래처,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다.“필룩스는 술 접대를 일절 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문화 접대’라는 의미도 컸어요.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야외에서 음악회를 즐길 수 있어 고객이나 거래처도 아주 좋아합니다.”한 번 참석한 사람들은 빛과 음악이 어우러진 웅장한 콘서트에 큰 감동을 받는다. 올봄에는 광주시 초청으로 광주에서도 똑같은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음악회를 보고 간 중국 정부 관리들도 공연 요청을 해 놓고 있다.문화 경영으로 달라진 사내 분위기는 1월 18일 신년 음악회를 겸해 열린 신년 사업 계획 발표회에서도 잘 확인된다. 이 자리에서 필룩스 28개 팀은 신년 계획을 담은 5~10분짜리 동영상을 각자 제작해 상영했다. 노 회장은 “딱딱한 사업 계획 발표회 형식에서 벗어난 재미있는 ‘꿈 파티’였다”고 말했다.조명박물관은 문화 경영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박물관이 중심이 돼 국내외 각 분야 예술가들과 다양한 전시회를 개최한다. 필룩스가 갖고 있는 빛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과 예술가의 뛰어난 감성 및 표현 능력이 결합해 독특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진다. 또한 주말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안경 착용률이 가장 높은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러브 캠페인’을 진행한다. ‘빛’의 소중함과 올바른 사용법을 알려주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연극을 배우고 무대에 공연을 직접 올려보는 ‘라이크 스타’ 행사를 개최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이제는 스토리텔링을 더해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야 팔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들도 재미없어 하고 제값을 치르지 않아요. 문화 경영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거죠.”그동안 중소기업들은 문화 경영을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로 받아들여 온 게 사실이다. 매출 규모가 큰 대기업은 홍보 효과를 노리고 일찌감치 문화 경영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당장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중소기업에는 ‘배부른’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필룩스뿐만 아니라 많은 중소기업에 문화 경영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김선화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문화 경영을 시행하면 중소기업에도 분명한 성과가 나타난다”며 “당장의 가시적 부담만 보고 문화 경영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문화 경영은 인사 제도와 리더십, 근무 환경, 기업 문화, 비전과 전략, 조직 운영, 일 자체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직원들의 성공 몰입을 강화한다. 김 위원은 “문화는 나이·성별·직급을 초월해 공감대를 창출하는 ‘무한 마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하지만 문화 경영이 생각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다. 관심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중소기업이 하나둘이 아니다. 문화에는 돈이 들어간다는 선입견도 걸림돌이다. 김 위원은 “거창하게 오페라 보고 연극 보는 것만 문화 경영은 아니다”며 “CEO의 의지만 있다면 기업 특성에 맞는 차별화된 문화 경영 전략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B2B 전자상거래 보증·결제 업체인 컴에이지는 직원 45명인 소기업이 어떻게 문화 경영을 도입해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무념무상(디자인팀 최재환 대리).’‘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 me strength(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경영관리팀 홍완선 팀장.)’‘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대표이사 김영욱).’컴에이지 사무실에는 특이한 명패가 하나씩 붙어 있다. 이름과 직급, 연락처, 개인 사진까지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아래 각자 써놓은 좌우명은 이색적이다. 김영욱(45) 사장은 “좌우명만 봐도 직원들의 스타일이 보인다”며 웃었다.김 사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칭찬 카드를 책상에 한 아름 풀어놓았다. 이 회사는 사원들이 서로의 장점, 잘한 점을 칭찬하는 칭찬 캠페인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함께 진행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켄 블랜차드의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컴에이지는 지난해 칭찬 문화를 정착시켜 사내 분위기를 확 바꾸는데 성공했다.온라인에 마련된 칭찬 게시판에선 가족적인 분위기와 자유분방한 활기가 느껴진다.‘맡은 일을 소신껏 하고 직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언해 주시는 최영수 부장님을 칭찬합니다. 새로 온 김종열 부장님을 잘 챙겨주고 업무도 잘 알려주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한 사원이 올린 칭찬 글 밑에 댓글이 24개나 달렸다.‘최영수 부장님 멋있습니다! 이번 워크숍에서 새로운 연예의 달인으로 떠올랐습니다.’‘본사 갈 때마다 따뜻한 미소로 항상 반겨주시는 부장님. 올해에는 부자 되세요.’칭찬 문화가 확산되면서 직원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의사소통도 눈에 띄게 개선됐다. 덩달아 기업 실적도 뛰었다. 컴에이지는 2009년 매출이 38% 증가하고 2008년 10억 원대에 달했던 적자가 흑자로 돌아서는 성과를 올렸다.이 회사는 위기 돌파를 위해 문화 경영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활용한 경우다. 2008년 모 상장 기업과의 입수·합병(M&A) 논의에 잘못 휘말리면서 컴에이지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리더십은 무너지고 사내 파벌이 득세했다. 결국 깊은 상처만 남긴 채 M&A는 깨졌고 회사는 길을 잃고 표류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김 사장은 최후의 방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2009년 초부터 매일 회의를 했어요. 정보기술(IT) 분야는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사장 혼자 뛰어서는 회사가 클 수 없지요.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감성을 건드리는 문화 경영이 필수예요. 아침마다 집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을 맞춰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하루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나씩 제도를 만들어 나갔죠.”문화 경영은 대부분 자체 개발한 그룹웨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룹웨어의 메뉴는 정보광장·휴게실·동아리·중고장터·뉴스 등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칭찬 캠페인이 진행되는 칭찬 게시판과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열리는 사내 교육 내용을 동영상으로 올린 교육 동영상 정도가 눈에 띈다. 컴에이지 그룹웨어의 가장 큰 특징은 포인트 제도에 있다.그룹웨어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은 포인트가 돼 개인별로 쌓인다. 8시 전에 출근 체크를 하면 30포인트, 9시까지 체크하면 20포인트, 댓글을 달면 5포인트, 칭찬 게시판에 칭찬 글을 올리면 50포인트, 쪽지를 보내면 2포인트를 주는 식이다.“갈수록 직원들이 쓰는 댓글이 길어지고 있어요. 점점 마음이 열리고 있는 거죠. 누적된 포인트는 포상과 승진, 연봉 협상에 반영합니다. 객관적 점수이기 때문에 직원들도 불만이 없어요.”컴에이지의 첫째 모토는 직원들이 즐겁게 출근하고 싶은 직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년 말 경조사 기금을 만들고 가족과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펜션도 마련했다. 워크숍도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야유회 형태로 바꿨다. 김 사장은 “사장의 솔선수범이 가장 중요하다”며 “예전에는 자기 계발이나 경제 분야 책을 주로 봤는데, 요즘은 가능하면 유머 책을 사 보려고 한다”며 밝게 웃었다.문화 경영에 관심을 갖는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중소기업중앙회도 문화경영지원팀을 만들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이원섭 문화경영지원팀장은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문화 경영”이라며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젊은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지난해 중앙회가 개설한 중소기업 CEO 대상 ‘문화경영아카데미’에는 56명의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참여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부 지원을 받아 1인당 50만 원으로 참가비가 저렴하고 박물관 관람 등 체험 위주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 문화경영아카데미 2기는 오는 4월 개강할 예정이다. 또한 문화 경영 확산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2007년부터 ‘중고기업문화대상’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이 밖에 직원들에게 문화 체험의 기회를 주려는 중소기업을 위해 ‘찾아가는 중소기업 문화 공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국악·클래식·연극·무용 등 20개 공연 가운데 원하는 것을 선택해 신청하면 해당 전문 예술 단체가 직접 회사를 찾아와 공연한다. 복권기금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연비용의 70%를 지원하기 때문에 참여 기업은 ‘기부금’ 형태로 나머지 30%만 부담하면 된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