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빅 보너스(big bonus) 딜레마

연초 월가에서 ‘빅 보너스(big bonus)’ 논란이 재차 거세지고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연초 연말이면 어김없이 미 정·재계를 뜨겁게 달궜던 이 이슈는 올해도 보너스 지급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내용은 다 알려진 대로다. 경제 위기 과정에서 혈세(血稅)로 조성된 공적자금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진 금융회사들이 이제 좀 먹고 살만해졌다고 ‘돈 잔치’를 벌여도 되는가 하는 비난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실직과 임금 삭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연일 금융회사들이 지급할 천문학적 액수의 보너스를 부각시키면서 “경제 위기의 장본인인 은행들이 위기 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나”라며 은행권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를 맹비난하고 있다. 정치권도 의회 청문회에 구제금융을 받은 은행 CEO들을 불러다 놓고 연일 채찍질 중이다.그러나 현장에서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점은 빅 보너스를 받는 월가 금융회사 사람들이나, 이를 맹비난하는 오바마 행정부나,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미국인들이나 모두 할 말이 많은 안타까운 처지라는 사실이다.거액의 돈벼락을 맞게 된 은행가들이 무슨 안타까운 처지일까. 이는 재계에 다소 호의적인 월스트리트저널이나 블룸버그통신 등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사실 월가 금융인들은 올해 천문학적 보너스를 받게 된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해 공적자금을 받은 씨티그룹·뱅크오브아메리카·골드만삭스·JP모건체이스·모건스탠리·웰스파고 등 월가 6개 대형 은행이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의 실적을 감안해 임직원 보너스 등으로 배정한 임금 총액은 1120억 달러(125조4400억 원)에 달한다. 이 액수는 4분기 실적까지 합하면 더 커지게 된다.사상 최대의 이익을 낸 골드만삭스는 임직원 953명에게 현금과 주식을 합해 일인당 평균 59만5000달러(약 6억7000만 원)를 보너스로 지급하기로 했다. 이는 역대 최고 보너스를 지급했던 2007년보다 더 많은 액수다.JP모건체이스도 2만5000명의 임직원들에게 평균 46만3000달러(5억1800만 원)를 나눠 줄 예정이다. 일부 금융사의 CEO나 좋은 실적을 낸 직원들의 보너스는 최고 수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보너스 액수로만 보면 월가는 이미 위기를 넘어 호황기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이런 사실이 전해지자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크리스티나 로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CNN에 출연, “공적자금을 받은 은행들이 지난해 실적이 좋다고 수십억 달러씩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한 것은 어리석은(ridiculous) 짓”이라며 “이 같은 행위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을 열 받게 하고 있다(offend)”고 강한 톤으로 비난했다.미국 산별노조총연맹(AFL-CIO)의 대니얼 페드로티 투자사무국 국장도 “금융회사 경영진은 은행 금고를 마치 자신들의 현금자동인출기(ATM)처럼 이용하고 있다”고 성토했다.의회에서는 보너스 특별세를 매기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 검찰총장은 은행들의 보너스 내역에 대한 불법 여부를 따지기 위해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온 미국인들이 월가의 돈 잔치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형국이다.그러나 은행들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골드만삭스 이사회 멤버인 빌 조지 씨는 “월가의 우수 인재들은 한 일만큼 보수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리를 떠난다”며 “그들은 프로 운동선수나 영화배우와 같다”고 말했다.월가의 임금 컨설턴트인 제임스 레바 씨는 “정부가 거액의 구제금융을 실시한 이유는 다름 아닌 금융 산업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며 “궁극적으로 금융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임금 제한 등의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투자은행 간 인재 유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 제한 등의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고 섣부른 임금 제한 조치는 자칫 싱가포르나 홍콩 런던 등 다른 지역에 금융 산업의 이니셔티브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이들은 또 고액의 보너스를 지급하더라도 적당한 보완 장치들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보너스에서 주식 비중을 높이고 있다. 주식 보너스는 매각 시기가 2∼3년 후로 제한되거나 향후 경영 실적과 연동되는 등 조건이 붙는다.골드만삭스는 이미 30명의 고위 경영진에게 보너스를 전액 주식으로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뱅크오브아메리카도 보너스에서 주식 지급 비중을 높이고 실적이 좋지 않으면 이를 환수할 수 있는 규정을 도입했다.블룸버그통신은 특히 “월가 투자은행들 간에 경쟁이 재개되는 시점에서 임금을 동결하거나 충분하게 지급하지 않는 것은 호황기에 제조 업체가 투자를 게을리 하는 것과 같다”며 “고액의 보너스 지급은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투자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는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그러나 여론은 이 같은 월가의 논리를 구차한 변명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월가의 탐욕스러운 금융인들이 여러 변명을 대고 있지만 결론은 혈세를 털어 구제해 준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혼자 잘살고 보자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이라는 지적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에서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는 위니 컬리 씨는 “주식 비중을 늘리고 여러 조건을 붙인다고는 하지만 보너스 지급액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고 한다”며 “월가의 돈 잔치가 경제 위기에서 신음하는 국민들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오바마 정부도 이 같은 여론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은행들이 지난해 부실자산 구제 프로그램(TARP)을 통해 받았던 빚을 모두 갚았거나 이미 갚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빚을 모두 갚은 민간은행의 임금 문제에 더 이상 간섭할 근거가 없다. 뉴욕타임스는 은행들이 이처럼 서둘러 정부의 빚을 갚는 이유를 임원 보너스나 영업 방식 등에 대한 정부 간섭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한 조치라고 해석했다.이 때문에 은행의 조기 상환을 허락한 미 정부의 결정은 치명적 실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뉴욕타임스는 “경제 상황이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웰스파고·씨티그룹 같은 소비자 금융 은행은 다시 엄청난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둔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이런 상황 전개가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고용 상황까지 풀리지 않는다면 천문학적인 세금을 투입하고도 금융권 구조조정은 물론 일자리 숙제까지 풀지 못한 무능한 정부로 낙인찍혀 선거에서 참패할 게 불 보듯 뻔하다. 특히 대선 과정에서 경제 위기 상황이 어느 정도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오바마로서는 이 같은 경제 분야의 실책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이 때문에 이 같은 은행권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오바마의 반응은 매우 격앙돼 있다. 오바마는 최근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살찐 고양이 같은 소수의 은행가들을 도우려고 대통령에 출마하지는 않았다”면서 월가 금융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그러나 말뿐이다. 오바마는 구제금융 CEO들의 보너스를 제한하는 법안을 냈지만 아직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엔 임원의 급여 수준이 높은 은행에 예금 보험료를 높게 책정하는 이른바 ‘은행세’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지만 이 역시 입법 과정에서의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어렵다.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박수진 한국경제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