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다가온 ‘잃어버린 10년’

“올해 경기는 극심한 침체를 겪었던 2009년보다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경기는 횡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주요 기업 10곳 중 6곳은 2010년 경기를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도쿄신문이 작년 12월 하순 일본의 주요 기업 206개사를 대상으로 올해 경기 전망을 조사한 결과다. 응답 기업의 62.4%가 현재의 경제 상황에 대해 ‘옆걸음’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금년 경기 전망에 대해서는 49.3%가 ‘완만하게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40.2%는 나아지지도 악화되지도 않은 채 ‘옆걸음질’할 것으로 예상했다. 2010년 새해가 밝았지만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어깨를 펴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뚜렷한 성장 비전과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각종 정책 운영과 인사에서 좌고우면하자 더욱 자신감을 잃은 모습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이 3번째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위험을 맞고 있다고까지 보도했다. = 지난해 12월 29일은 일본 경제의 자산 거품이 붕괴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89년 12월 29일 일본 경제의 버블이 정점에 달해 닛케이주가지수가 장중 3만8957.44엔으로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직후 일본 경제는 버블이 터지면서 주가가 급락하고 부동산 가격은 날개 없는 추락을 했다.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의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작년 말 도쿄증시의 닛케이주가지수 종가가 1989년 12월 29일 주가의 4분의 1에 불과한 점을 들었다. 명목상의 국내총생산(GDP)도 엔화 기준으로 당시 거품이 폭발한 직후 수준에 머물렀다고 저널은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 정권은 앞으로 10년간 GDP 성장을 연평균 3% 이상으로 유지한다는 정책 목표를 밝혔다. 일본 정부는 경기 촉진을 위해 환경·의료 및 관광 부문 등에서 모두 1조1000억 달러 규모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목표와 계획은 달성하기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으로 인한 경기 침체)이 몇 년째 이어지는 반면 이렇다 할 극복책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부가 내세운 1% 인플레 목표치는 말로만 달성되는 게 아니다. 정부가 소비 진작을 위해 고속도로 무료 이용과 휘발유세 인하 등을 약속했지만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그렇다고 일본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건 아니다. 첨단 기술력과 탄탄한 교육 기반, 그리고 고급 인프라가 받쳐주는 점은 일본의 희망이다. ‘일본주식회사’의 대외 경쟁력은 여전히 탄탄한 편이다. 그러나 정부가 계속 정책 결정을 주저하는 것이 일본주식회사가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악재다. 올해 일본은 중국에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지위를 내줄 상황이다.또 고령화 사회로 연금 수요와 의료비용 급증에 대처해야 하지만 노동력과 수요의 위축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하다. 이 같은 위기에 정치권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재정 확충을 위해 불가피한 소비세 인상은 정치권의 눈치 보기로 2013년까지로 미뤄진 상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새로운 10년이 새롭게 출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며 “일본이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입증될 것으로 보인다”고 논평했다. = 일본 경제 전망이 어두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불안한 정권이다. 작년 9월 출범해 4개월째인 하토야마 정권은 대미 관계, 정치자금 문제 등으로 흔들리면서 경제를 챙길 겨를이 없다. 1월 18일 소집되는 통상국회(정기국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정치권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번 통상국회는 하토야마 정권 출범 후 첫 정기 국회다. 또 오는 7월 실시되는 참의원 선거의 향방을 가를 대형 ‘재료’들이 다뤄질 예정이어서 여야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야권은 하토야마 총리와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의 정치자금 문제, 미국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오키나와현 후텐마 미군 비행장 이전 문제, 사상 최대 규모로 팽창한 올해 예산안 등을 놓고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다.통상국회가 1월 18일 열리면 회기가 150일이므로 6월 16일까지 계속된다. 통상국회의 가장 큰 임무는 올해 예산안과 이를 뒷받침할 각종 법안의 처리다. 정부·여당은 올해 예산안으로 작년 당초 예산에 비해 4.2% 증가한 92조2992억 엔의 사상 최대 예산안을 편성해 놓고 있다. 올해 예산안은 과거 자민당 정권이 경기 부양을 위해 중시했던 도로와 댐 등 사회기반시설(SOC)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자녀 수당 등 복지 예산을 늘린 것이 특징이다.야권은 이런 예산 편성이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겨냥한 선심성이 강한 반면 경기 부양 대책이 부실하다고 보고 예산의 재편성을 요구한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중의원 의석 300석이 넘는 ‘숫자 우위’를 확보하고 있어 예산안과 각종 법안 처리에 큰 문제가 없다.이 때문에 야권은 미·일동맹의 균열을 부른 후텐마와 하토야마 총리·오자와 간사장의 정치자금 문제에 공격을 집중할 전망이다. 후텐마는 하토야마 총리가 정권 출범 이후 줄곧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미국에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100일간 한 일이라고는 ‘올해 5월까지 결론을 내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밖에 없다.정치자금 문제 역시 하토야마 총리와 오자와 간사장이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위장 정치헌금 문제는 검찰 수사 결과 하토야마 총리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비서만 불구속 기소됐다. 하토야마 총리가 모친으로부터 받은 12억6000만 엔의 정치자금에 대해선 6억 엔의 증여세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나는 전혀 몰랐다”는 하토야마 총리의 해명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오자와 간사장은 2004년 정치자금 관리 단체인 리쿠잔카이가 구입한 토지(3억4000만 엔)를 둘러싸고 자금 조달 과정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면서 측근이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 일본의 이번 통상국회는 ‘정부·여당 수세, 야권 공세’의 구도가 될 수밖에 없게 됐다. 회기 중에 하토야마 총리나 오자와 간사장의 정치자금을 둘러싼 새로운 의혹이 불거질 경우 민주당은 7월 참의원 선거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후텐마 이전지 결정 시한도 5월로, 회기 중이어서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정국을 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정부·여당이 후텐마와 정치자금 문제를 큰 상처 없이 돌파한다면 정국 운영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하토야마 총리의 정치 생명이 단축되는 등 정국 전반에 소용돌이가 불가피하다.야권은 벌써부터 하토야마 총리의 사퇴와 중의원 해산을 요구하는 등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자민당의 다니가키 사다카즈 총재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위장 헌금 문제를 겨냥해 “내각이 총사퇴하고 중의원을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정치자금 문제로 코너에 몰린 하토야마 총리도 스스로 여론이 계속 나빠지면 퇴진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작년 말 자신의 경리담당 비서가 불구속 기소된 12월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아지면 국민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이 문제로) 정치가 정체되고 국민 대다수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도 총리직을 계속하면 국민에게 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위장 정치 헌금에 대한 자신의 사과와 해명에도 여론이 계속 나빠지면 사임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졌다.이번 통상국회는 7월 열리는 참의원 선거의 판도와 하토야마 총리의 롱런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