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한 포스코경영연구소 소장

김준한(58) 포스코경영연구소장은 2010년 글로벌 경제의 특징을 ‘역동조화(counter coupling)’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신흥국 시장이 빚잔치에 몰린 미국 소비자를 대신해 세계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로 등장하면서 ‘미국이 기침을 하면 다른 나라는 감기에 걸린다’는 동조화론은 철지난 옛말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신흥 시장이 앞장서고 선진국이 그 뒤를 따르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1994년 설립된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신흥시장 연구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이는 중국·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신흥국에 집중해 온 모기업 포스코의 글로벌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 경제 연구소 가운데 유일하게 베이징과 델리에 현지 사무소가 있고 2006년부터 중국과 인도 경제에 관한 전문 잡지 ‘친디아’를 발행한다. 2009년 12월 29일 삼성동 연구소에서 김 소장을 만났다. 최근 위기 극복 과정을 보면 선진국보다 신흥국이 훨씬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마이너스 성장을 했지만 신흥국은 대부분 플러스 성장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앞으로 세계경제에서 신흥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커질 것으로 보여요. 따라서 신흥국의 영향력도 점점 커질 것입니다. 과거 선진국 경제가 성장하면 신흥국과 개도국이 따라서 같이 성장하는 ‘커플링’ 현상이 나타났지만 앞으로는 완전히 뒤집힐 거예요. 신흥국이 성장을 주도하고 선진국이 따라오는 ‘카운터 커플링’이 시작되는 겁니다.신흥국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는 양극화 현상이 보입니다. 중국이나 인도처럼 ‘V’자에 가깝게 가파르게 회복된 곳이 있는가 하면 러시아처럼 침체 상태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곳도 있지요. 특히 러시아는 그동안 ‘브릭스(BRICs)’의 한 축으로 각광받아 왔는데 이제는 러시아를 빼고 인도네시아를 추가한 ‘비시스(BICIs)’ 개념이 더 환영받을 정도예요. 전반적으로 신흥시장이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회복이 빠른 곳과 그렇지 못한 곳으로 나뉘는거죠.신흥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게다가 성장률도 높아요. 이들이 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고성장 궤도에 들어선다는 것은 세계경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인구로 보면 중국이 14억 명, 인도는 12억 명에 달해요. 러시아도 1억4000만 명, 브라질은 1억9000만 명이죠.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내수시장이 커질 잠재력이 높다는 걸 의미하지요. 중국은 2010년 국내총생산(GDP) 5조 달러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겁니다. 자원이 풍부한 것도 신흥시장이 고성장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죠.미국발 금융 위기의 직격탄에서 한발 벗어나 있었던 데다 정책 대응도 빨랐기 때문입니다. 중국을 예로 들어 보죠. 중국은 이번 경제 위기와 관련해 모두 4조 위안 규모의 경기 부양 대책을 가동했어요. GDP의 18%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죠. 내수도 살리고 소득 격차도 완화하기 위해 농촌 지역 가전제품 구입에 보조금을 주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을 도입했고 자동차를 살 때 취득세를 절반으로 깎아주는 조치도 작년 5월부터 시행했지요. 이 덕분에 1분기만 하더라도 성장률이 6.1%로 걱정스러운 수준이었지만 2분기 7.9%, 3분기 8.9%로 올라섰어요. 성장률 8%는 중국 경제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마지노선입니다. 매년 1000만 명이 노동시장에 신규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려면 성장률이 최소 8%는 돼야 하기 때문이에요.그렇지 않아요. 2009년 강력한 경기 부양 정책으로 중국의 내수시장이 커지면서 한국 기업들은 불황 속 특수를 누렸지요. 가전하향 정책은 구매액의 13%를 현금으로 되돌려 주는 겁니다. 너도나도 TV와 냉장고를 사려고 몰려들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 액정표시장치(LCD) 생산 라인은 작년 상반기에도 풀가동했어요. 이뿐만이 아니죠. 베이징현대자동차는 아반떼의 중국 현지화 모델인 위에둥과 엘란트라(아반떼의 수출명)을 판매하는데 위에둥이 월 4만 대, 엘란트라가 월 1만 대씩 팔려 나갔어요.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되는 전 세계 200여 개 모델 가운데 위에둥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요. 1600cc 이하에만 적용되는 세제 혜택의 수혜를 본 거예요.중국은 2009년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세계에서 자동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나라는 이제 중국인 거죠. 이는 미국 자동차 시장의 몰락과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중국은 2008년 94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 판매했어요. 2009년에는 이보다 40% 이상 증가한 1300만 대를 생산했고 2010년에는 1600만 대 돌파가 예상됩니다. 거꾸로 미국 시장은 2007년 1610만 대, 2008년 1320만 대, 2009년 900만 대로 점점 쪼그라들고 있지요. 중국은 미국과 나란히 ‘G2’라고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만 성장 속도나 경제 규모로 볼 때 G2 체제는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인도 역시 상당히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는 중국에 견줘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지요. 우선 인도는 금융과 정보기술(IT) 서비스업의 비중이 매우 높아요. 바꿔 말하면 제조업 기반이 취약합니다. 이것이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요. 인도의 취약한 인프라도 성장을 가로막는 병목현상을 유발합니다. 복잡한 행정 절차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죠. 포스코가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한 지 5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 착공하지 못하고 있어요. 한국 기준으로 보면 진행 속도가 답답할 정도지만 인도 기준에서는 대단히 빠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정부가 친기업 정책을 펴고 있고 2009년 총선에서 집권당이 압승을 거둬 정치적 안정 기반을 확보한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에요.러시아는 2009년 성장률이 마이너스 8% 안팎으로 추정되고 2010년에도 2.5%대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부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예요. 먼저 러시아 경제는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요. 러시아의 수출에서 석유와 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70%나 돼요. 경제 위기로 국제 유가 등 에너지 가격이 폭락하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거죠. 또 하나는 낙후된 금융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러시아 현지에서 파이낸싱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대부분의 러시아 기업이 외국계 은행에 의존하는 형편이에요. 정치적 불안도 부담 요인이죠. 오늘의 러시아 경제의 기틀을 닦고, 또 여전히 움직이는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예요. 그런데 이번 경기 위기를 겪으면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목소리가 상당히 커졌습니다. 이런 미묘한 정치적 분위기가 가겨온 결과는 러시아 경제에 중요한 결정들이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두바이 금융 위기로 전 세계가 긴장했지요. 두바이가 여러 측면에서 불안한 상태인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다른 중동 국가들은 두바이와 큰 차이를 갖고 있지요. 두바이는 금융과 관광, 물류 허브를 지향하며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여 사막을 거대한 빌딩 숲으로 바꾸어 놓은 곳입니다. 금융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반면 최근 한국전력공사가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주한 아부다비는 처음부터 두바이와 성격이 달라요. 이미 2년 전부터 중동의 건설 플랜트는 두바이에서 아부다비로 이전되고 있었지요. 두바이 금융 사태에서 한국 기업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중동의 중심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는 여전히 견조하고 공업화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어요.많은 나라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첫째가 자원이에요. 자원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나라는 중국입니다. 일본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이제 한국도 자원 확보를 놓고 중국·일본과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시장 선점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후발주자로 뛰어드는 만큼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아프리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어요. 6월 남아공 월드컵을 계기로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약력: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1978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90년 미국 밴더빌트대 경제학 박사. 1993년 국무총리실 지구환경대책기획단 위원. 1995년 산업연구원 소재산업연구실장. 1997년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본부장. 2003년 대구경북연구원 동향분석실장. 2006년 포스코경영연구소 대표이사 소장(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