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망나니 같은 생활에 푹 빠져 있을 때 그 소문이 아버지에게 전해지자 크게 진노하시며 회초리를 들고 죽기 직전까지 때리셨다.1978년 10월 79세로 작고하신 지 벌써 31년, 그동안 내게 좋은 일이 있었을 때마다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라며 아쉬워했던 아버지 김종성, 그분을 추모하며 몇 가지 적어본다.에피소드 1. 1951~52년 6·25전쟁 중 황폐기에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겨울의 ‘참새 잡이’, 여름의 ‘참외서리’를 거쳐 가을의 이웃 동네 ‘닭서리’로 발전되어 망나니 같은 생활에 푹 빠져 있을 때 그 소문이 아버지에게 전해지자 크게 진노하시며 회초리를 들고 죽기 직전까지 때리셨다.“애초에 잘 될 배추는 그 떡잎부터 알아보는데 너는 이미 싹수가 노래서 큰 인물 되기는 틀렸구나!….” 한탄하시고 또 한탄하시며 좀처럼 매를 놓지 않았다.에피소드 2. 1953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춘기를 맞아 키도 훌쩍 크고 바람난 친구들과 어울렸다. 친구 따라 빨간 모자챙에 가죽 구두를 신고 2년 위인 김창대 춘천여고 학생을 ‘S누이’로 삼자 아버지가 서울로 전학시킬 것을 결심하신 것 같았다.“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아들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이제 1953년 7월 휴전 협정도 되었고 하니 너를 서울로 전학시키려고 한다.”우리 두 부자는 1954년 3월 종로구 낙원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서울 유학(중앙고)을 시작하였다. 그 후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정도를 걸어 연세대 상경대를 졸업한 후 한국은행 조사부, 상공부 장관 비서관, 한국은행 런던 사무소 조사역을 거치는 동안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다. 그후 영국 에든버러대 경제학 석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아버지는 내가 콜롬보 플랜 사무총장,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 사무총장이 된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러나 후일의 대기만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때의 모진 회초리와 고등학교 때의 주저 없으셨던 결단이었던 것을 가슴에 새기며 고인을 다시 떠올린다.아버지는 4남 1녀 중 장남으로 경기도 포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전기기술학교를 나온 후 경성전기주식회사에 취업, 약 3년간 일하시다가 조선일보 강원도 담당 취재기자가 되셨다. 그 후 강원도 원성군 흥업면 무실리 이장을 하시며 배 과수원과 산림, 그리고 농장을 경영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부하들을 은밀하게 돌보아 주셨다. 광복 후 원주초등학교 후원회장, 원주중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교육에 전념하셨다.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1954년 2월 옛날의 전기기술 자격증으로 서울시청 상공과 동력선 배전 고문으로 취직하시고, 아들 김학수를 중앙고등학교에 전학시켰다. 민주당 신익희 씨와 가까웠던 원주 국회의원 윤길중 씨의 적극적인 권유와 주선이 있었던 것을 후일 알게 되었다.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교육열이 남달랐으며 교육을 시키는 이유 또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동량이 되기를 바라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뿐이라는 철학과 소신이 분명하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세월이 빚어낸 향기는 고개 너머까지 퍼진다. 아버지는 당신의 세월이 빚어낸 향기를 아낌없이 아들에게 보내셨다. 피란 후 원주중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가 모두 불타 잿더미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무가 울창한 무실리의 우리 집 뒷산을 학교 부지로 쓰라고 제공했다.당시 무실리의 우리 집 야산은 호랑이처럼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의 덕택에 도벌과 땔감 도둑질을 철저히 단속해 근처에서 보기 드물게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지금은 바로 그곳에 새로 지은 원주시청이 시민들의 울타리로 거듭나 자리 잡고 있다.1938년 강원 원주 출생. 2000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유엔 사무차장 겸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 사무총장에 선출돼 8년 동안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그 후 아시아경제공동체재단 이사장을 맡아 아시아의 경제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0년 연세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