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 사내 전산망 ‘속도 차별’ 논란

증권시장에서 선물 옵션은 주문 체결 속도가 생명이다. 옵션의 호가를 빨리 파악해 유리한 포지션으로 먼저 주문을 접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가치보다 저평가된 옵션이 매물로 나왔을 때는 시쳇말로 ‘먼저 먹는 놈이 장땡’이다. 선물 옵션 시장에 참여하는 마켓 메이커(유동성 공급자:골드만삭스, 소시에떼제네랄 등 10여 개사)들은 속도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주문이 느리면 아예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전산 매매 기법이 발달하면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주문이 컴퓨터에 의해 순식간에 접수된다. 이 때문에 1ms(밀리세컨드:1000분의 1초), 1μs(마이크로세컨드:100만 분의 1초)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 증권사들은 전산 시스템에 투자하고 전산 담당자들은 밤을 새우기 일쑤다. 이 때문에 국내 증권사들의 전산망은 한국거래소(거래소)의 주문 접수 시스템이 있는 여의도에 집중돼 있다. 여의도 전경련 빌딩 옆의 KT 전산센터나 거래소 바로 앞의 데이콤 전산센터의 서버를 이용하고 있다. 이른바 하드웨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코스콤(거래소 전산 담당 자회사) 전산망 속도 차별’ 논란은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업체들 사이의 이전투구가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대형 증권사들이 여의도에 위치한 전산센터를 이용하는 이유는 지방에 있을 경우 기지국을 2개 이상 거치면서 속도에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권사들은 되도록 거래소 가까이에 있으려고 한다. 그런데 거래소 내부에 입주한 업체가 거래소 내 접속망을 이용하면 기지국을 하나도 거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외부에 있는 업체보다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논란의 중심이 된 거래소 입주 업체는 KB선물·부은선물·NH투자증권·리딩투자증권이다. 업계에 따르면 이들 업체들이 주문을 넣을 때 걸리는 최대 속도는 0.012초(12ms), 다른 증권사들이 외부에서 주문을 넣을 때는 0.016초(16ms)다. 무려 25%(0.004초)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업계에 따르면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거래소 내 입주사가 속도에서 유리하다는 소문은 업계에 음모론처럼 계속 나돌던 얘기이기도 하다. 몇몇 증권사가 이를 꾸준히 문제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거래소 측은 “차이가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거래소가 문제없다고 하니 증권사들로서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9월 2일 각 증권사 전산담당 부서장들을 불러 모은 회의와 4일 CIO(Chief Information Officer:최고정보책임자)가 참석한 회의에서 몇몇 업체들의 추궁에 거래소가 속도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론화됐다.업계에서는 삼성증권이 주도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증권은 모그룹의 뛰어난 정보기술(IT) 관련 기술을 동원해 최신의 시스템을 갖추고 데이터센터도 수원에서 여의도로 옮길 정도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정작 거래소 입주사들에 속도가 뒤지고 있는 상태다. 거래소 입주사들만 제외하면 삼성증권이 속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것으로 알려진다.삼성증권 관계자는 “속도라는 것은 그 회사의 투자와 노하우에 따라 결정되는 ‘실력’인데 조건 자체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래소 내 입주사들도 외부 통신망을 이용하도록 해야 동일한 경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에 대해 부은선물 관계자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주장일 따름이지 명확한 데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속도에 목숨을 거는 모든 마켓 메이커들이 우리 업체를 이용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주문량에 따라 순간적으로 속도에 차이가 날 수는 있어도 평상시에는 데이터 용량이 큰 업체가 더 빠르지 않겠느냐”며 반박하고 있다. 거래소 내 입주사들 중에서는 주문 접수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부은선물이 타깃이 되고 있어 가장 크게 반발하고 있다.이 관계자는 이어 “이런 문제는 이미 미국에서 10년 전에 제기됐다가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난 일이다. 한국에서 지금 이것으로 시끄러워진다는 것은 국제적 망신”이라며 “거래소 내 서버를 이용하는 것이 문제라면 타 업체들도 거래소에 입주하면 되는 것이지 작은 업체가 비용을 들여 시스템을 고치라는 것은 대형 업체의 횡포”라고 주장하고 있다.삼성증권 관계자는 “한 업체만 거래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주문 자체가 막히기 때문에 마켓 메이커들은 보통 다수의 업체와 거래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다만 거래의 조건을 공평하게 하자는 것일 따름”이라며 “이 문제가 알려진 뒤 전 세계의 금융회사가 주시하고 있다. 잘못하면 한국 금융시장이 신뢰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반박했다.한편 부은선물 측은 “최근 삼성증권이 거래하던 ‘올 옵션스’라는 외국계 마켓 메이커가 빠져나가면서 부은선물 때문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업체는 우리에게 오지 않았고 오히려 삼성증권이 증거금의 5배까지 거래를 체결해 주는 관례를 따르지 않는 등 타사에 비해 준법 감시가 너무 빡빡하니까 거래처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거래소 내 랜망이 그렇게 빠르다면 왜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처음부터 거래소 내에 데이터센터를 두지 않았을까’라는 궁금증이 든다. 이는 2007년 10월 거래소가 시스템을 변경하면서 속도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과거 방식은 모든 회사들이 밖에서 접속해야 해 속도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스템에 따라 속도가 차이 나게 된 것이다.문제는 이를 해결할 만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거래소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입주사들에 통신망을 변경하거나 퇴거할 것을 권고했지만 강제 사항이 아닌 권고 사항일 따름이다. 부은선물 측은 “거래소가 재임대를 하지 않겠다는 등 엄포를 놓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고, 삼성증권 측은 “국내 유일의 거래소인데, 자율 권고가 먹히지 않으면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가 거래소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며 대치하고 있다.거래소 측도 “법무 질의를 한 결과 로컬 연결(사내 전산망)이 불법은 아니다. 거래소는 조정자의 역할이지 법적 권한이 없는 것을 강제할 수는 없다. 올해 안에 업무규정·수칙을 감독기구와 협의해 수정해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금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의 전화가 걸려와 업무를 못할 지경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외국계 큰손들이 이탈할 수도 있고, 또 고객들이 집단으로 소송할 여지도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한편 이런 속도 차이를 이용해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고주파 거래(HFT:High Frequency Trading)도 한국에서 가능하지 않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고주파 거래란 초고성능 전산 시스템을 이용해 타인의 주문이 접수·체결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내에 먼저 주문을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1만 주를 누군가 사려고 매수 주문을 한다면 주가 상승을 예상하고 미리 사 놓는 것도 가능해진다.업계 관계자는 “코스콤 문제는 전산 시스템의 속도 차이가 논란이므로 거래를 미리 눈치 채고 주문을 먼저 넣는 고주파 거래와는 거리가 멀다”며 “미국은 NYSE, 나스닥, 상품거래소 등 거래소가 복수이므로 한 거래소의 용량이 부족해 다른 거래소로 넘어갈 때 주문을 사전에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주문이 각 증권사 전산망을 통해 단일 거래소에서 최종 집계되기 때문에 타사에서 미리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