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추석 연휴 알차게 만들 ‘문화의 향기’

=‘내 사랑 내 곁에’는 ‘너는 내 운명’의 속편으로 느껴지는 박진표 감독의 신작이다.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이미 눈물샘을 자극한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 분)는 우연히 옛 친구 지수(하지원 분)를 만난다.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종우는 지수에게 사귀자고 말하고 장례지도사인 지수 또한 시체 닦는 일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혐오감을 자아냈던 자신의 손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불러주는 종우가 싫지 않다. 결국 둘은 결혼에까지 이르지만 종우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기 시작한다.‘너는 내 운명’의 다방 레지와 순박한 촌놈처럼 ‘내 사랑 내 곁에’의 루게릭병 환자와 장례지도사는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오직 둘만 있으면 된다는 질긴 인연을 믿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랑은 지나치게 ‘닭살스럽고’ 징글징글하지만 그것이 바로 박진표식 멜로가 갖는 힘이다. 세상이 답답하고 다른 이들이 그들의 사랑을 우려해도 그럴수록 사랑은 더 커진다. 몸무게 감량으로 이미 화제가 됐던 김명민의 연기는 딱히 더 설명할 이유가 없을 듯하고, 하지원 역시 그에 못지않게 고생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종우의 병실 주변을 채우고 있는 다른 환자들의 섬세한 에피소드도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감독: 박진표/ 출연: 김명민, 하지원, 가인/ 개봉: 9월 24일/ 분량 121분/ 등급: 12세 관람가=‘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조선 말기를 배경으로 한 ‘팩션(Faction=fact+fiction)’ 영화다. ‘왕의 남자’ ‘신기전’ ‘미인도’ ‘쌍화점’에 이르기까지 실제 역사에 영화적 허구를 결합한 그 방대한 신(新)사극의 계보를 잇는 영화인 셈. 막연히 죽음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명성황후에게 숨겨진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상력을 자극한다.은둔 자객으로 살아가던 무명(조승우 분)은 어느 날, 목표물을 제거하기 위해 찾은 곳에서 자영(수애 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며칠 후 황후가 될 몸이다. 무명은 자영을 죽을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직접 대원군(천호진 분)을 찾아가 궁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치른다.‘불꽃처럼 나비처럼’은 1980~90년대 인기 무협작가 야설록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탄생했다. 원작이 다소 남성적인 느낌이었다면 영화는 외롭고 쓸쓸했지만 강한 여성이었던 민자영의 삶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수애가 앞서 연기한 ‘님은 먼곳에(2008)’와도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궁에서 외로운 삶을 살았던 여인. 그녀는 남편의 사랑과 말벗을 그리워한,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여인이었다. 질긴 로맨스가 다소 지나친 긴장감을 자아내지만 사극 멜로의 팬이라면 놓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감독: 김용균/ 출연: 조승우, 수애/ 분량: 124분/ 개봉: 9월 24일/ 등급: 15세 관람가= 추석에도 블록버스터는 있다. 게다가 주인공은 바로 영원한 ‘다이 하드’의 히어로 브루스 윌리스다. ‘써로게이트’란 한 과학자가 인간의 존엄성과 기계의 무한한 능력을 결합해 발명한 대리 로봇을 말한다. 즉, 미래 사회는 써로게이트를 통해 완벽하고도 완전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써로게이트의 사용자가 죽임을 당하면서 그리어(브루스 윌리스 분)가 수사에 나선다.감독은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2003)’의 실패로 자취를 감춘 듯했던 조너선 모스토다. 하지만 ‘U-571(2000)’에서 그가 보여줬던 밀폐된 공간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왜냐하면 써로게이트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공황 상태로 위험에 내몰리는 경험은 그와 비교할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성이 파괴된 세계를 무대로 한 ‘써로게이트’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더없이 훌륭한 주인공이다. 모두가 기피하는 임무를 떠안아 악전고투하면서 기어이 악당들을 처단하고야 마는 ‘다이 하드’ 시리즈의 ‘존 매클레인’과 똑같기 때문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완전히 대머리가 된 모습이 애처롭긴 하지만 임무 수행 능력 하나만큼은 여전하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거느린 ‘대리 로봇’이라는 설정도 흥미롭고 액션신의 볼거리 또한 추석 연휴 극장가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것 같다.감독: 조너선 모스토/ 출연: 브루스 윌리스, 라다 미첼/ 분량: 88분/ 개봉 10월 1일/ 등급: 15세 관람가=‘써로게이트’와 경쟁하는 화끈한 블록버스터라면 단연 ‘게이머’다. 아니, 순수하게 전투 액션신의 물량과 화력만 비교하면 ‘게이머’가 월등히 앞선다. 가까운 미래, 전 세계인들은 ‘슬레이어즈’라는 온라인 FPS(First-Person Shooter:1인칭 슈팅게임)에 열광한다. 한 10대 소년이 조종하는 캐릭터 케이블(제라드 버틀러 분)은 게임 속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지만 자유를 구속당한 채 게임을 계속해 나가던 중 문득 게임 개발자의 음모에 맞서 반란을 주도한다.주목할 만한 포인트는 역시 최근 ‘300’ ‘어글리 트루스’ 등을 통해 할리우드의 새로운 ‘마초 완소남’으로 떠오른 제라드 버틀러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무지막지하다. 게임 캐릭터이기 때문인지 무제한의 파워를 얻는 것도 거기에 한몫한다. 그가 참여하는 전투는 참혹하다 싶을 정도로 실감나게 펼쳐진다. 누군가의 조종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가 게임 개발자와 대치한다는 설정은 마치 ‘매트릭스’에서 봤던 현실과 가상 세계의 교차를 연상시키지만 그처럼 깊이 있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게이머’는 오직 게임 속 세계의 현란함과 화려함을 내세운다. 제라드 버틀러를 내세운 킬링 타임용 영화,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감독: 브라이언 테일러, 마크 네빌딘/ 출연: 제라드 버틀러/ 분량: 95분/ 개봉: 10월 1일/ 등급: 15세 관람가=‘뮤지컬이 대세’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요즘 ‘페임’은 ‘맘마미아’의 영광을 꿈꾸는 작품이다. 앨런 파커 감독의 오리지널 ‘페임’에는 여러모로 미치지 못하지만 케빈 탄차로엔 감독의 ‘페임’ 역시 결코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이다.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뉴욕의 피오렐로 라 구아디아 예술학교에 오디션을 통과한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온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르코(애셔 북 분), 청순한 외모의 제니(케이 파나베이커 분), 댄스 귀신 앨리스(케링턴 페인 분) 등은 최고를 꿈꾸며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최근 놀라운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는 국내 케이블 프로그램 ‘슈퍼스타K’와 겹쳐보면 흥미로울 정도로 ‘페임’은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관객을 들썩이게 하지는 못할 터. ‘페임’에는 실제 ‘코러스 라인’과 ‘헤어스프레이’ 등에 출연 중인 젊고 근사한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다. 케빈 탄차로엔 감독 역시 이미 유명한 안무가다. 굳이 다시 한 번 ‘맘마미아’와 비교한다면 아이린 카라가 불렀던 테마곡 ‘페임’을 떠올려 볼 일이다. ‘맘마미아’의 ‘아바’와 비교하기는 머쓱하지만 적어도 그 노래 하나만큼은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만인의 애창곡이니까 말이다.감독: 케빈 탄차로엔/ 출연: 애셔 북, 케이 파너베이커, 케링턴 페인/ 분량: 106분/ 개봉: 9월 24일/ 등급: 12세 관람가= 2001년 초연 당시 24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관객을 동원한 대작 ‘오페라의 유령’이 올 추석에 맞춰 돌아왔다. 뮤지컬의 살아있는 전설,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라는 수식어 정도로 ‘오페라의 유령’의 감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오페라하우스 지하에 숨어 사는 음악 천재 팬텀과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귀족 청년 라울. 세 사람이 노래하는 사랑의 아리아는 그 어떤 뮤지컬보다 강렬하고 또 아름답다.특히 이번 공연은 250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제작비로 이전에 공연된 그 어떤 ‘오페라의 유령’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를 재현한다. 가장무도회와 오페라극장 지하 촛불 신, 공중에서 추락하는 샹들리에 등 화려한 무대장치도 압권이지만 무엇보다 ‘오페라의 유령’을 대표하는 뮤지컬 넘버들은 한 번 듣는 순간 마음을 지배하는 느낌을 들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The Phantom of the Opera(오페라의 유령)’ ‘The Music of the Night(그 밤의 노래)’ ‘All I Ask of You(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 등의 명곡들이 새로운 배우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될지 궁금하다. 절대적인 신뢰를 품은 작품인 만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2010년 8월 8일까지/ 샤롯데씨어터(잠실)/ 티켓가 4만~12만 원/ 문의 (02)501-7888= 초연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올슉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으로 만들어진, 제대로 된 ‘뮤지컬’다운 작품이다. 가무 금지, 연애 금지를 선포한 마을에 ‘영혼엔 노래를 담고 가슴엔 사랑을 담아 떠도는 방랑자’ 채드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소동을 그린다. 가죽 재킷에 선글라스, 살벌하게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까지 영락없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하는 채드는 적막했던 마을에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고, 그 덕분에 조용하던 마을은 엇갈린 ‘사랑의 작대기’로 시끌벅적해진다. 여기에 채드를 향한 짝사랑으로 남장도 마다하지 않는 나탈리의 고군분투가 더해지면서 극은 훨씬 더 리듬감 있게 진행된다.‘올슉업’의 백미는 역시나 시작부터 끝까지 흥겹게 흐르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이다. 세월이 지나도 전혀 녹슬지 않은 그의 음악은 ‘올슉업’의 또 다른 주연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빛바래지 않은 스물네 곡의 노래가 개성 만점 캐릭터들을 통해 새롭게 불려질 때 원곡에선 느끼지 못했던 재미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올슉업(All Shook Up)’은 사랑에 빠져 미치도록 기분 좋은 상태가 될 때를 뜻하는 말이다.11월 1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 4만~12만 원/ 문의: 1588-5212= 연휴를 맞아 연인이 함께하기에 제격인 데이트 뮤지컬로 ‘싱글즈’를 적극 추천한다. 영화 ‘싱글즈’를 뮤지컬로 옮긴 이 뮤지컬의 장점은 ‘공감’의 코드에 있다. 공연하는 배우들도 공연을 보는 관객들도 ‘스물아홉 살’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에 100% 몰입하게 되는 흡입력을 자랑하는 것.생일 선물로 오래된 연인에게 차이고, 잘나가던 디자이너에서 레스토랑 매니저로 좌천당하고, 울 기운조차 남지 않은 처절한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맞은 주인공 나난. 서른 살을 앞두고 “내가 변한 건지, 꿈이 변한 건지.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내가 서로 다른 대답을 해”라고 울부짖는 나이,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주변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고 위에서 까이고 아래에서 치이는 스물아홉 살이 서럽기만 하다.‘싱글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민만 늘어가는 스물아홉 살의 애환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게다가 지나간 사랑의 빈자리는 새로운 사랑으로 채워지는 법이고, 절대적으로 믿었던 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란 ‘인류 보편의 법칙’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오픈 런/ PMC대학로자유극장/ 전석 4만 원/ 문의 (02)501-7888=웃어도 웃어도 끝이 나지 않는 웃음의 무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미타니 고키의 ‘웃음의 대학’이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다. 작년 초연 당시 객석 점유율 100%를 기록했을 만큼 이 연극의 매력은 제목 그대로 끊이지 않는 ‘웃음’에 있다.때는 바야흐로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모두가 웃음을 잃어버린 비극의 시대. 극단 ‘웃음의 대학’의 전속 작가 츠바키는 2주 후 무대 위에 올릴 대본을 들고 검열을 신청한다. 하지만 검열관은 이런 시대에 희극 따윈 필요 없다며 거침없이 공연 ‘불허가’ 판정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만만치 않은 대결이 시작된다.한정된 공간, 단 두 명의 등장인물, 그리고 1주일의 시간. 철저하게 독립된 공간으로 존재하는 ‘웃음의 대학’은 대본의 치밀한 구성으로 쉼 없는 웃음을 쏟아낸다. 작가와 검열관이 대본을 수정하며 벌이는 극중극은 관객들의 긴장을 이완시킴과 동시에 제때 제때 웃음을 유발한다. 특히 이번 앙코르 공연의 캐스팅이 아주 흥미롭다.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봉태규와 관록의 연극배우 안석환 송영창이 환상의 호흡을 선보인다.11월 22일까지/ 대학로 문화 공간 ‘이다’ 1관/ 3만~4만 원/ 문의 (02)766-6007= 석을 맞아 가족을 돌아보는 연극 한 편 보는 것도 좋은 공연 나들이가 될 듯싶다. ‘친정엄마와 2박 3일’은 제목 그대로 이 세상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한 공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는 단출하다. 딸이 간암으로 죽기 전 엄마와 보내는 2박 3일이 100분 동안 무대 위를 소박하게 지킨다. 잘난 딸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엄마지만, 그래도 그 딸 덕분에 웃는 날이 더 많은 엄마. 그 엄마에게 딸은 인생의 전부다.쉽게 예상 가능한 빤한 이야기지만 ‘친정엄마와 2박 3일’의 장점은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대사에 있다. 아무리 부딪치기 싫어도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징글맞게 싸우고 금세 화해하고 부대끼는 관계를 꼽으라면 단연 엄마와 딸. 가장 가까우면서 쉽게 상처 주는 복잡 미묘한 모녀 관계를 통해 가족의 애틋함을 이야기한다.초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마치고 다시 앙코르 공연에 들어갈 만큼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은 굉장히 뜨겁다. 엄마 역의 강부자와 딸 역의 전미선의 열연에 절로 눈물이 난다.11월 15일까지/ 동국대 이해랑 예술극장/ 전석 4만4000원/ 문의 (02)6005-6010= 순수문학 도서로 국내 최단시간인 10개월 만에 100만 부 돌파. 이 정도라면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는 ‘문학작품’을 읽는다기보다 ‘사회현상’을 읽는 것에 가깝다. 오늘날 대중의 정서가 어떠한지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엄마’라는 다소 진부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작가는 평범한 밥과 된장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진수성찬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양식당에서 칠성급 호텔 주방장의 요리를 시식한 후 집에 와서는 밥과 김치를 먹어야 잠이 오는 한국인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밥’이나 마찬가지다.책은 치매에 걸린 엄마의 행방불명 이후 기억 속 엄마와의 기억들을 더듬는다. 책을 덮는 순간,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한 엄마지만 그 엄마의 인생에도 스무 살 소녀의 꿈이 깃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아련히 가슴에 남는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작가의 문장은 책을 손에 든 순간 다 읽을 때까지 절대 놓칠 수 없도록 만든다. 카페나 지하철에서 읽다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주의할 것.신경숙 지음/창비 펴냄/299쪽/1만 원=우리는 타인에게 무엇으로 기억될까. 외모, 학벌, 집안, 재력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개는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로 기억될 것이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누군가의 명함들이 그 증거다.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일은 나의 대부분을 규정한다고 얘기한다. 이것이 이 책을 쓴 이유다. “만약 화성인이 지구의 문학작품을 읽는다면 아마도 모든 인간이 사랑에 빠지고, 가족과 싸우고, 또 이따금씩 서로 죽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하고 있는 것은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을 표현한 예술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한 가지 사물을 보고 백 가지 이상의 생각을 떠올리는 특기를 가진 작가는 태평양의 어부, 로켓 엔지니어, 회계사, 창업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일하는 사람(worker)’ 곁에 착 달라붙어 온갖 생각의 날개를 펼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작가의 의도는 마지막에 나온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과장하려는 충동은 지적인 오류이기는커녕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짧은 연휴가 아쉽지만, 자기 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읽은 보람은 있을 것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이레 펴냄/374쪽/1만5000원= 저자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있다. 목욕탕에서 옷을 빨리 입는(성기 크기가 부끄러운) 남자와 늦게 입는(성기 크기가 자랑스러운) 남자”라고 얘기한다. 그 사례로 자신의 친구라고 하는 사회 저명인사들의 실명이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저자는 영화 ‘타짜’를 보면서 김혜수의 큰 가슴에 빠져들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갈수록 가관이다. 한 시간에 수십 번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유머 강사의 강의를 코앞에서 듣는 것처럼 문체가 생생하다. 저자는 시종일관 “제발 좀 심각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즐겨라”고 주문한다.시시껄렁한 얘기처럼 보이는 내용을 열거하는 작가의 의도는 “사는 게 재미있고 유쾌해지면 사람들의 기본적인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망설임이 없다. 창조적이며 타인들과 보다 협조적으로 행동한다. 훨씬 더 과감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펀 경영’의 실체다.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한다고 내가 절대 가벼운 사람은 아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어로 플라톤, 칸트를 강의까지 한 사람이다”며 자신의 가벼운 얘기를 결코 가볍게 듣지 말라고 애걸조로 얘기한다. 마지막까지 ‘감탄’을 멈출 수 없는 책이다.김정운 지음/쌤앤파커스 펴냄/300쪽/1만3000원= 1930년생인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1940년대 일본 군국주의와 전쟁의 실상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된 소설이다. 1945년 고베 대공습, 다른 집들은 이미 다 대피해 버린 줄도 모르고 중학생 H와 그의 엄마는 순진하게도 정부가 훈련시킨 대로 집에 떨어진 소이탄을 물로 끄려다 목숨이 위험해진 상황을 겪은 뒤 정부의 거짓 선전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일이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H는 비로소 알게 된다.그 외에도 왜 일왕이 직접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어야 했는지, 왜 현신인(現神人)으로 불렸던 일왕이 맥아더 앞에 조아리고 선 사진에 일본인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새삼 우리가 놓쳤던 일본 역사의 한 단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책을 읽다 보면 일본 군관학교를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침 조회, 애국가 제창, 국기에 대한 맹세 등 군국주의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한국에 옮겨다 놓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세노 갓파 지음/페이퍼로드 펴냄/382쪽(1권), 399쪽(2권)/각 권 9800원= 이 책을 읽는 동안 지하철과 할인점 등에서 같은 책을 읽거나 들고 다니는 여성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그만큼 무라카미 하루키 팬의 저변이 한국에서도 넓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것이 하나의 ‘패션 소품’이 된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1Q84’는 1984년과 비슷하지만 또 하나의 세상을 겪는 주인공이 명명한 세상이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남녀 주인공의 에피소드가 번갈아 이어지면서 서서히 만나게 된다. 조각조각 흩어진 파편들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큰 그림을 만드는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를 준다.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궁금증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싸인’ ‘빌리지’를 보는 듯하다. 다소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므로 연휴 중 하루를 작정하고 읽으면 적당할 듯하다.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문학동네 펴냄/655쪽(1권), 597쪽(2권)/각 권 1만4800원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주성철·씨네21 기자 kinoeyes@hanmail.net이유진·무비위크 기자 illenne@moviewee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