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의 아버지

사위가 아직 새벽 동트는 것을 부끄러워할 시간인데, 현관의 종소리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울리며 성급하게 꼬리를 감추곤 이내 녹음된 전자 게이트 록의 “잠겼습니다”란 부지런한(?) 여성의 목소리가 잠시 이어진다.아버지가 바깥세상으로 나가시는 길이다. 게으른 아들은 이 소리를 들으며 어제 훈육을 이유로 휘두른 회초리 탓에 다리에 붉은 기타줄 선명한 아들 녀석의 방으로 향한다.별자리 조명이 천장을 비추는 아들의 방에서 물끄러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딱 지금의 아들 녀석 만할 무렵 아버지로부터 호된 매질을 당했던 기억이 꼬리를 문다. 한동네 떨어져 살던 어린 사촌동생 녀석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동네에서는 아이를 찾느라 부산스러운 발걸음이 이어졌던 모양인데 우리 집에도 아이의 행방을 묻는 어른들이 다녀가셨다.전화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수고로운 발걸음 없이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어른들이 다녀가신 후 ‘찾았다’거나 ‘아직도 못 찾았다’거나 추가 기별이 없다보니, 아버지가 나를 전서구(편지를 전하기 위해 훈련된 비둘기)처럼 파발로 띄우셨는데 한참 흑백 TV에 빠져 있던 나는 형편없는 영리한 계획으로 동네 골목 끄트머리에 숨어 있다가 “하나” “두울”을 세면서 이만큼이면 다녀올 만큼의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고는 숨을 헐떡이며 “찾았대요”라고 말씀을 드렸다.하지만 TV를 보는 재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도 안 들어 왔다”는 친척 어른의 재방문으로 산산조각이 나면서 처음으로 아귀 같은 표정의 ‘아버지’를 보는 것도 잠시, 마당 수돗가에 있던 호스 자락이 나를 향해 관운장의 청룡언월도 춤추듯 쌩쌩거리며 나를 혼절케 했다. 혹독한 대가의 이유는 하룻밤 천리도 간다는 ‘거짓말’ 때문이었지만 그 말을 키운 건 나였다.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살갑게 가깝거나 의중이 잘 통하는 편은 아니다. 늘 ‘근면’과 ‘성실’ 빼고는 가족들을 부양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는 시간적으로도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던 것 같다.새벽길 길가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면 출근길을 바꿔 경찰서로 향하는 아버지었고, 시골 화전민촌 같은 고향 마을에 꼬물꼬물 자라고 있는 팔형제의 맏이라는 자리는 젊은 청춘 아버지의 손바닥에 차돌처럼 박인 못과 함께 아버지 스스로만을 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그런 아버지의 성실과 근면이 아니고서는 쌀 두 섬을 빚내 서울로 향하신 아버지를 통해 학창 시절 한 번도 납부금을 밀리지 않았던 나의 그런 자존심을 어찌 기대할 수 있었을까.아들 녀석이 뒤척인다. 녀석도 아버지가 될 터이다.녀석은 문제집 답안지를 베껴 쓰고는 다 풀었다는 ‘거짓말’로 회초리를 맞았다. 성격 급한 집사람의 호된 된서리를 피하게 하려고 선수를 쓴 것인데 녀석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고서도 할아버지의 중재가 있고서야 집사람의 고된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나는 아직도 아버지를 팔씨름으로 이기지 못한다.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아버지를 아직도 이기지 못하는데 아버지는 무릎 관절로 고생 중이시다. 칠순을 내일로 앞둔 아버지는 아들놈의 만류를 한사코 거절하고 일터로 나가시곤 했다.돌산의 돌을 캐던 젊은 청년기를 보내신 후 우리나라 최고의 음식점에서 만두와 냉면을 만드신 30년의 시간을 통해 아버지는 무엇을 얻으셨을까.오늘 저녁에는 ‘아들’녀석을 데리고 ‘아버지’가 계신 아버지의 일터로 가야겠다. 그곳에 아버지의 평생이 있을 터이다.아버지가 만든 만두를 먹으며 이름이나 좀 팔고 있는 아들놈의 체면으로 아버지의 인생을 만류했던 아들놈의 ‘거짓’을 용서 빌어야 할 것 같다. 오늘 저녁의 만두는 짠맛이 나려나….1967년생.1992 서울시립대 졸업. 93년 하얀서적 경영. 95년 럭키슈퍼스토어 경영. 96년 맥진컴바인 관리차장. 98년 봉정실업 본부장. 2001년 삼성C&D 기획실장. 2004년 삼화I.D.I기획실장. 2005년 상가뉴스레이다 대표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