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승부리나

기술 개발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면서 산업스파이 역시 기승부린다. 기술 개발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다른 기업의 기술을 몰래 빼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 스파이는 치열한 기술 경쟁과 정보 전쟁 시대의 어두운 이면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산업스파이를 21세기 유망 산업으로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국내에서 산업스파이 사건, 특히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이 늘어났다는 것은 거꾸로 국내 기업도 해외에서 탐낼만한 기술을 확보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선발 기업을 따라잡기 급급한 시기에는 기술 유출 문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 기업들이 반도체,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등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세계 선두로 올라서면서 처지는 뒤바뀌었다. 기술 도약을 꿈꾸는 중국과 러시아 등 후발국 업체들이 국내 기술을 탐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아예 국내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인수·합병(M&A)에 나서기도 한다. 한 보안 산업 전문가는 한국의 세계 일류 상품 수와 산업스파이 사건 건수는 함께 움직인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이 전문가는 “2000년 27개에 불과하던 세계 일류 상품은 지난해 120개로 증가했다”며 “이 기간 산업스파이 사건도 급증했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1997년 외환위기 후 평생직장 개념의 붕괴와 연구·기술 인력의 홀대, 고용 불안도 기술 유출 사건의 급증 요인으로 꼽는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해고·실직에 대비하려면 무엇이든 ‘자료’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된 것이다. 여기에 설령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더라도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회사에 있다는 인식이 희박했던 것도 한몫했다. 한마디로 기술 유출이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이 약한 것이다. 이런점에서 산업스파이는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범죄로 꼽힌다.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권태종 기술보호팀장은 “학연·지연으로 얽힌 인맥 관계가 기술 유출 사건으로 발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회사의 처우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선후배 가운데 활용 가치가 있는 사람을 유혹해 기술을 빼내는 것이다.국가정보원 통계를 보면 기술 유출의 가장 큰 동기는 의외로 ‘금전 유혹(31.9%)’이 아니라 ‘개인 영리(45.7%)’다. 개인 영리는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관련 자료를 집에 몰래 보관하거나 자기 회사를 차리기 위해 기술을 들고 나간 경우다. 2006년 터진 포스데이터 와이브로 핵심 기술 미국 유출 기도 사건이 대표적이다. 인사 발령에 불만을 품은 포스데이터 전직 연구원은 “기술을 빼내 큰돈을 벌자”며 동료들과 함께 기술 자료를 빼내 미국 실리콘밸리에 회사를 차렸다. 이들은 문제가 불거질 것에 대비해 미리 법률 검토를 받는 치밀함까지 보였다.반면 금전 유혹은 돈을 받고 기술을 빼내 다른 회사에 넘긴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보통 전직 약속과 집·승용차 등이 덧붙는다. 물론 구체적인 액수는 천차만별이다. 2003년 삼성SDI 전직 부장은 PDP 다면취 공법 기술을 대만 업체에 2000만 엔(약 2억6000만 원)에 넘기려고 했었다. 2004년 팬택 전직 연구원들은 휴대전화 제조 기술을 홍콩 업체에 빼돌리고 스카우트비로 5000만~1억2000만 원을 챙겼다.일단 기술 유출 사건이 터지면 해당 기업의 피해는 치명적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권 팀장은 “중소기업들은 잘나가던 매출이 갑자기 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기술 유출 사실을 아는 경우가 많다”며 “기술을 빼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몇 년씩 소송을 하다 보면 작은 기업은 소송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을 정도가 된다”고 말했다. 권 팀장은 특히 해외 진출 중소기업이 기술 유출에 취약하다고 밝혔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