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스파이(spy)’라는 용어는 ‘비밀리에 적대국의 내정·동정 등을 탐지해 보고하는 자, 또는 자국의 비밀을 수집해 적대국에 제공하는 자’로 정의된다. ‘스파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아군과 적군이 전제돼야 한다. 그래야 애국심 때문에 죽음도 각오하는 스파이가 존재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산업스파이’는 사실 부정확한 용어다. 회사를 옮기는 사람은 ‘스카우트’된다고 생각하지 ‘스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 사람을 포섭해 정보를 함께 가져오도록 지시하는 사람이 스파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스파이는 모습을 감추고 포섭된 사람이 잡히고 처벌된다.또 산업스파이라는 용어도 적절하지 않다. 워낙 무시무시한 말이다 보니 정작 회사의 비밀을 빼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산업스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경력 직원이 직장을 옮길 때는 당연히 동종 업체로 가는 것일 테고, 옮겨가는 이유는 당연히 전 직장에서 닦아 놓은 경험과 기술 때문일 것이다. 그 경험과 기술은 당연히 기록돼 있을 테고 이것이 본인의 것인지 회사의 것인지 아리송한 경우도 많다. 이럴 때 ‘내가 산업스파이?’라고 자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드러나지 않은 기술 유출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중국 정부가 호주의 철광석 업체 리오틴토 직원들을 산업스파이로 체포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사건의 배경은 철광석 수출업체 간의 경쟁, 중국의 가격 협상력 등이 겹쳐진 것이겠지만 어쨌든 꼬투리가 잡힐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정작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산업스파이들을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받고 있는 중국이 타국 회사 직원에게 산업스파이라는 꼬리표를 씌운 것은 아이러니다.중국과 러시아가 급성장하는 이면에는 선진국의 기술을 단기간에 따라잡기 위한 치열한 정보전이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이번 특집을 위해 인터뷰(36페이지)에 응한 전직 ‘산업스파이’도 기술을 유출하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대기업 직원이었던 그는 “업계에서 이 기술은 자체 제작도 하지만 외주 제작도 하는데 당연히 디자인과 설계 규격이 공개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다만 그는 “이런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왜냐 하면 당시 회사는 사업의 급격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퇴사자 증가로 인한 핵심 인력 유출 문제가 가장 큰 이슈였고, 이를 줄이기 위해 기 퇴사자들의 근무처를 조사하고 경우별로 대처 방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나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그의 말대로라면 국내 기업들의 경우 유출 정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문제가 불거지면 그때 상황에 따라 주관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는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대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개인과 조직 간에 현상을 체감하는 ‘온도차’가 존재했던 것이다.근본적으로는 회사가 기술의 보안 등급을 매기고, 이를 단계별로 관리하며 직원들에게도 보안 의식을 교육하는 등의 사전 조치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런 보안 시스템을 갖춘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견기업, 중소기업들에서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마련이다.또 시스템을 갖추고도 정작 직원들이 이를 불편해하면서 지키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게 마련이다. 산업 현장에서 ‘안전’과 ‘보안’은 늘 ‘능률’과 ‘관행’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직원들에게 수시로 교육을 실시해 보안 의식을 늘 자각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심지어 보안 책임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밀 접근에 제한이 없는 최고경영자(CEO)나 임원들이 나쁜 마음을 먹을 경우 속수무책이라는 것이 현직 기업 보안 담당자들의 말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보안 책임자에게 보다 강력한 권한이 주어져야 하고 CEO부터 솔선수범하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정보 유출의 사전 방지가 가능하다.그러나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이 ‘딴마음’을 품지 않도록 평소에 인재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 기술을 다루는 연구원은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와 처우로 금전적 유혹에 빠지기 쉽고, 처우 불만 시 경쟁 업체의 승진 및 고액 연봉 등의 제의에 쉽게 흔들릴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직원들의 처우·사내복지·직원 간의 분위기 등 모든 업무 환경이 기업 보안의 영역이 될 수 있다. 취재=우종국·장승규·송창섭·이홍표·이진원 기자사진=서범세·김기남·이승재 기자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