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라.누구보다 네가 아버지를 닮았어….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셨어. 좋은 이야기를 찾아 사랑하렴….”막내인 아버지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막내인 덕분에 형님들의 후원까지 얻어 서울 유학도 했다. 철도학교를 나와 철도청 담임이 되었는데, 그것이 집안에서는 큰 출세였다. 1940년대에 관사를 배정 받아 순화동 1번지에서 살게 되니, 서울에서 공부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고 싶은 시골의 형제들은 모두 우리 집에 머무르며 터전을 닦곤 했다. 아쉽게도 그 집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뒤 이화여고 운동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엔 효창동 철도 관사를 새로 배정 받아 살았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 중 하나였다.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늘 ‘스토리가 있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죽은 뒤 남는 건 ‘어떻게 살았느냐’일뿐 나머지는 다 허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신은 스토리가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게 언행이 다른 아버지를 싫어했다. 스토리는커녕 가족에게 상처를 줄 정도의 외도를 했는가 하면 가끔은 술 마시고 들어와 어머니에게 손찌검도 했다. 어머니를 지키다 보면 내 얼굴에 멍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이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야속했던 순간을 기억에서 끄집어내 들려주곤 했다. 나는 어머니 편을 들어 아버지를 경멸(?)하며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밥 먹듯 되뇌는 아이로 자랐다.아버지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철도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가겠다고 떼를 써 결국 농사짓는 일소를 팔아 일본을 다녀온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 일은 온 동네의 화제가 되었다. 지나고 나서는 웃으며 하는 옛말이 되었지만 당시 집안에선 얼마나 난감해 했을까.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가족에게 연락도 없이 혼자 피신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은 내게서 아버지를 더 멀리 떼어놓았다. 어떻게 가족을 두고 혼자 피신할 수 있었을까.“어쩔 수 없었어, 그때 빨리 피신하지 않았으면 아버지는 북에 끌려갔거나 돌아가셨을 거야. 아버지 직장 동료 중에 빨갱이가 한둘이 아니었단다.”어머니가 아버지를 두둔하는 말을 하거나, 그래도 사랑하는 몸짓을 보이면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화를 냈다. “나는 엄마 같은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반항하기도 했다. 혈연도태(血緣淘汰)하려는 심정이었을까. 나를 희생해 아버지의 참회와 반성을 끌어내 보겠다는 생각에서 사전 의논 없이 월남전에 참전해 2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행적들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장성해 결혼을 앞둔 하루 어머니와 함께 공원을 산책했었다. 그 무렵 나는 아내 될 사람을 위해 자나 깨나 흥얼거리며 연습하는 노래가 하나 있었는데 토셀리의 세레나데였다. 왜 그 곡이 그렇게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가사도 감미롭지만 멜로디가 고향의 음악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는 그날 나에게 그 노래를 한 번 불러달라고 했다.‘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노래를 부르고 나니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어쩌면 그렇게 아버지하고 똑같으니.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정말 맞는구나….” “엄마에게 들려준다고 연습한 노래였단다. 너희들 어렸을 때만 해도 자주 부르셨지….”토셀리의 세레나데가 고향의 노래처럼 친숙했던 것은 어릴 때 자주 들은 기억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라. 누구보다 네가 아버지를 닮았어…. 그건 너를 미워하는 거야. 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셨어. 좋은 이야기를 찾아 사랑하렴….”그런 것이 삶의 스토리였나? 그날 이후 나는 비로소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나를 위해서도 아버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이요 스토리는 사랑 속에서 찾아지고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이기윤·소설가 겸 저널리스트1949년생. 1988년 중편 ‘살아있는 무’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장편소설 ‘군인의 딸’로 제3회 민족문학상을, 장편 ‘영혼의 춤’으로 제27회 한국소설문학상을 받았다. 포스코 신문에 ‘지구촌 대기행’을 1년 반 동안 연재한 기행 작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