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 인맥’ 학현학파

‘학현학파’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의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 경제학파로 ‘경제 정의 실천’과 ‘부의 공정한 분배’에 학문적 기반을 두고 있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 남덕우 총리의 ‘서강학파’가 경제성장의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면 학현학파는 성장에 따른 부작용,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공정 경제 쪽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학현학파를 이해하기 위해선 수장인 변 교수의 경제관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시장경제는 만능이 아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더더욱 그러하다. 시장의 기능을 맹신하면 불공평한 부의 분배, 소득의 분배가 발생할 수 있다.”(2004년 12월 사회안전망 포럼 강연 내용 중)학현학파는 사회복지 정책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철학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변 교수 스스로도 자신의 경제철학 근간이 마셜에서 비롯됐다면서 제자들에게 “냉철한 두뇌와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경제학을 배우려거든 런던 이스트엔드(빈민가)에 가보라”는 1885년 마셜의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직 취임사를 자주 강조했다.성장이라는 관점을 국민총생산(GNP), 국내총생산(GDP)으로만 해석하면 부의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기 힘들다는 학현학파의 주장은 1970~1990년대 경제개발 시기에는 ‘성장’이라는 서강학파의 논리에 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공직보다 강단에서 성장 제일의 미국 방식이 아닌 공정한 부의 분배를 강조하는 유럽식 경제 모델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런 관점은 케인스주의에 기반을 둔 조순학파와도 뚜렷이 구분된다.학현학파가 본격적인 체계를 갖춘 것은 지난 1980년 국보위로부터 강제 해직된 변 교수가 제자들의 후원으로 1982년 광화문에 ‘학현연구실’을 설립하면서부터다. 당시 학현연구실은 변 교수의 개인 연구실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사회경제학의 체계를 이룩한 산실이었다. 이후 학현연구실은 1993년 서울사회경제연구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진보 경제학 연구의 중심으로 성장한다. 변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서울사회경제연구소는 현재 2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정운찬 총리 내정자도 지난 2005년까지 이 연구소의 이사로 활동했다. 이후 설립된 한국사회경제학회, 한국경제발전학회 역시 학현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또 다른 축으로 발돋움하게 된다.학현학파의 학문적 목표는 분배 정의 실현, 경제구조의 균형 발전, 자립 경제로 요약된다. 변 교수는 고도성장의 진짜 목적이 성장 자체보다 장기 집권이라는 정치적인 논리에서 비롯됐다며 정치적인 사안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중소기업 주도의 경제구조, 특정 국가에 치우치지 않는 자립형 경제구조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이러다 보니 학현학파의 활동 영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라이벌인 서강학파가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경제 관련 장관 등을 배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학현학파는 집권 여당보다 야당, 재야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경실련 등 사회 시민단체 창립에 적극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던 학현학파가 제도권에 입성한 것은 지난 1998년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정부 출범부터다. DJ 경제정책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학현학파 출신의 경제학자들이 대선 직후 대거 정부 요직에 진출하면서 재야 생활을 마무리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직전 조직된 중경회(DJ 경제자문단)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민의 정부 경제철학을 수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당시 정부 참여에 주도적으로 나선 학현학파 출신의 경제학자는 이선 경희대 교수(전 산업연구원 원장)을 비롯해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수석, 금통위원), 윤원배 숙명여대 교수(전 금융감독위 부위원장), 신봉호 서울시립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비서관), 이진순 숭실대 교수(전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등이다.이들이 국민의 정부를 기점으로 관계 진출에 적극 나선 것은 변 교수와 DJ의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학현학파 출신이 주도가 돼 DJ의 경제철학인 대중경제학의 토대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등도 범학현학파로 분류되는 인사다.학현학파의 활동 무대는 참여정부로까지 이어졌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김병준 국민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김대환 인하대 교수(전 노동부 장관), 강철규 서울시립대 교수(전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참여정부의 핵심 자리에 올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하지만 학현학파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계와 관료 집단의 엄청난 저항에 밀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다.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경제를 정치의 도구로 만들었다는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국민의정부 초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되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태동 교수가 관료 사회와의 갈등으로 1년 만에 경질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학현학파의 위치는 1998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관계에서 학계, 시민단체 등 재야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킨 신자유주의의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현 정부를 향한 학현학파의 비판 수위도 한결 높아지고 있다. 이정우 교수는 지난 8월 대구에서 열린 한국경제발전학회, 한국사회경제학회, 서울사회경제연구소 공동학술대회에서 “전봇대 뽑기로 상징되는 규제 완화가 시대적 요구인양 유행하고 있는데 지난해 미국 경제를 강타한 금융 위기가 지나친 규제 완화, 시장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때 규제 완화 일변도의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번 경제 위기가 미국식 경제 모델의 한계를 드러냈다면서 분배 정의가 꽃핀 ‘유러피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학현학파의 대표 학자로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정일용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학현 선생은 경제학의 기본인 강단과 현장의 간극을 최소화하는데 일생을 바친 경제학자이자 사상가”라면서 “교육·의료·부동산·사회복지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그의 혜안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학현학파는 경제와 경제학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자 하며 물량적 성장보다 경제의 정의, 민주화, 자립을 표방하는 경제학자 그룹이다. 현실 개혁적이고 참여적이면서 실사구시적 학문 활동을 추구한다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바다.세계경제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분배 정의가 강조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찾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고 있다. 우리(서울사회경제연구소)가 고민하는 것은 민주주의 후퇴에 따른 경제 위기다.지나치게 분배에만 신경 썼다는 비판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공정한 부의 분배를 시도한 적이 없다. 북유럽의 사민주의를 살펴보면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1년에 한차례씩 대규모 심포지엄을 열고 있으며 세미나도 매주 개최하고 있다. 또 1개월에 한 번씩 월례 토론회와 소그룹 모임을 갖고 우리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송창섭 기자 realso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