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케인스학파’ 조순학파

이명박 정부로부터 총리직을 제안 받은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는 최종 결심을 하며 평생 ‘학문적 아버지’로 모셔온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정 내정자는 조 명예교수의 수제자로 ‘조순학파’의 선두 주자다. 미국 유학파 1세대인 조 명예교수는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공직에 첫 진출했다. 이후 한국은행 총재와 초대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고 이를 발판으로 정계에 뛰어들어 대권을 꿈꾸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 실험은 상처와 씁쓸함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정 내정자의 총리 입각은 조순학파의 두 번째 도전을 의미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를 주도한 ‘서강학파’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개혁 청사진을 그린 ‘학현학파’에 견줘 조순학파는 규모와 영향력에서 열세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 내정자가 2기 ‘MB노믹스’를 책임진 파워 총리로 발탁되면서 향후 경제 흐름을 좌우할 학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정 내정자는 지난 2007년 대선 출마 문턱까지 갔던 경험 때문에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도 꼽힌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조언하는 전문 관료 역할을 벗어버리고 경제 전문가로서의 비전을 직접 실현하려는 대담한 시도가 모두 조순학파에서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다.조순학파의 정체성은 ‘한국의 케인스주의’라는 말로 잘 요약된다. 물론 국내 경제학계에서 학파 구분이 정교한 이론적 토대보다 사제 관계 등 인맥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조순학파로 불리는 경제학자들을 하나의 틀로 묶기는 쉽지 않다. 실제 조순학파는 친기업적 목소리를 내온 좌승희 전 한국경제연구원장에서부터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까지 구성원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조순학파의 핵심인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구체적 사안에서는 입장 차이가 있지만 시장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 그리고 이에 따른 정부 개입의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있다”고 말했다.조 명예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케인스 전문가다. 1968년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국내에 케인스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케인스의 주저 ‘일반이론’을 처음 번역한 것도 그다. 하지만 조 명예교수가 케인스의 최고 권위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케인스 경제철학을 추종하는 ‘케인스주의자’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 명예교수는 오히려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는 실용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이에 비해 정 내정자는 훨씬 선명한 케인스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개혁적 케인스주의’라고 정식화했다.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현실 진단과 처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를 성장 둔화와 양극화로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돌출된 이 과제는 그 후 여러 정권이 등장했지만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근본적인 해법은 1970년대 이후 근대화를 이끈 압축 성장, 불균형 성장, 양적 성장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조 명예교수는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이데올로기도 압축 성장의 연장선에 불과했다”고 단언한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중심국가론’도 압축 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을 압축 성장으로 해결하려는 무모한 시도라고 본다.미국식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도 이들의 대안은 아니다. 전성인 교수는 “정 내정자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이라고 봤다”며 “현실에서 시장은 훨씬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잘 작동하려면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케인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부의 적절한 개입’은 과거 개발연대의 관치경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 조순학파는 ‘잘못된 관치’와 ‘잘못된 시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셈이다.조순학파는 10년간의 미국 유학을 끝낸 조 명예교수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탄생했다. 당시 서울대에서 미국 박사 출신 경제학 교수는 그가 유일했다. 선진 학문에 목말라 있던 경제학과 수재들이 이 40세 젊은 교수 밑으로 몰려들었다. 정 내정자를 비롯해 김승진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장, 김중수 주OECD 대표부 대사,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이영선 한림대 총장, 서준호 숭문고 교장 등 66학번과 이계식 부산발전연구원장,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 등 67학번이 그들이다.조 명예교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고전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경제학의 핵심 원전들을 직접 읽고 토론하자는 취지였다. 여기에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조순학파의 산실이 됐다. 이 모임은 ‘경제사상연구회’로 이름을 바꿔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1988년 말 부총리 입각으로 시작된 공직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불균형 성장의 폐해를 바로잡는 구조개혁 정책은 3당 합당을 준비하던 집권 세력과 재계의 성장 우선론과 불협화음을 빚었다. 특히 서강학파의 주축인 이승윤 민정당 정책위의장은 “경제가 병들고 있는데 안이한 사람이 많다”, “민정당이 무슨 사회주의 정당인 줄 아느냐”며 수시로 ‘조순 때리기’에 나섰다. 1990년 3당 합당 후에는 제도 개혁 연기, 성장 우선 정책, 단기 부양책 요구가 노골화됐다. 결국 조 명예교수의 임기는 1년 3개월로 끝났고, 이어 맡은 한국은행 총재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중도 하차로 막을 내렸다.평소 상아탑에 안주하지 않는 현실 참여를 제자들에게 강조해 온 조 명예교수는 1995년 초대 민선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정치인 조순’으로 또 한 번 변신에 나섰다. 학계에 퍼져 있던 제자들은 ‘자문 교수단’을 구성해 정책 개발에 나섰다. 자원봉사단장으로 뛴 정 내정자는 은행에서 3000만 원을 신용 대출받아 선거 운동에 몽땅 쏟아 붓기도 했다. 시장 당선 뒤에는 서준호 당시 서강대 교수가 시정개발연구원장을 맡아 조 명예교수를 도왔다. 1997년 민주당 총재 때는 김승진 한국외대 대학원장을 당 정책위의장에 앉히기도 했다.조순학파의 1세대 직계 제자 그룹 가운데 김중수 대사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거쳐 한림대 총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초 이명박 정부 첫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활약했다. 이근식 교수는 1989년 경실련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고, 현재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경실련의 산증인이다. 이영선 총장은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을 거쳐 지난해 한림대 총장에 취임했다. 이계식 원장은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와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신진 학자그룹은 ‘조순-정운찬 학파’라는 명칭이 더 어울린다. 그만큼 정 내정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정 내정자가 1990년부터 운영해 온 금융연구회 멤버들이 주축이다. 이들은 올 초 정 내정자의 정년퇴임을 대비해 한국금융연구센터를 개설했다. 전성인 교수가 센터 소장을 맡고 김상조 교수를 비롯해 정지만 상명대 교수, 서근우 금융감독원장 고문, 이기영 경기대 교수, 신관호 고려대 교수, 원승연 영남대 교수 등이 이사진에 포진해 있다.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약력: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49년 서울대 상대 졸업. 67년 UC버클리 경제학 박사. 68년 서울대 교수. 8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92년 한국은행 총재. 95년 서울시장. 97년 민주당 총재. 97년 한나라당 총재. 2000년 민주국민당 대표. 200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저서: ‘경제학원론’, ‘한국경제의 현실과 진로’, ‘J.M. 케인즈’, ‘화폐금융론’, ‘한국경제의 이해’ 등.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