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2004~2007년 우리은행장으로 재직 당시 은행계의 ‘검투사’를 자처했다. 우리나라 은행들도 이제 대출 사업에서 벗어나 해외 진출과 과감한 투자로 자산 확대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는 황 회장 개인만의 행보는 아니었다. 농협 등 대다수의 은행과 보험사들도 우리은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금융권엔 투자를 권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는 은행장 간담회에서 대출에만 매달리지 말고 투자은행(IB)으로 변신하라고 재촉했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황 전 행장은 과감하게 파생 상품에 투자했다. 우리은행은 2004년 6월부터 2007년 7월까지 고위험·고수익 파생 상품인 부채담보부증권(CDO)과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에 15억8000만 달러(약 1조8100억 원)를 투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돈으로 1조6200억 원, 투자한 금액의 90%가량을 손실로 떠안았다.금융감독원은 지난 9월 4일 오전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우리은행 종합 검사 및 CDO, CDS 투자에 따른 손실에 대해 책임을 물어 우리은행 임직원 총 40여 명을 제재하기로 하고 이 건을 금융위에 상정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황 회장에 대해 ‘직무정지 상당’의 징계안도 들어 있었는데 지난 9월 9일 금융위가 이를 수용했다.금융 당국의 징계가 확정됨에 따라 예금보험공사도 조만간 우리금융이 지난해 4분기 적자를 내는 등 경영이행약정(MOU)을 달성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 소재를 가릴 예정이다.이번 결정으로 황 회장의 현직 유지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5년간 새로 금융사 임원으로 일할 수 없어 연임이나 다른 금융사로 옮기는 것이 어렵게 된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금융계에서 일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하지만 금융 당국도 이번 결정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금융 당국은 당시 파생 상품 투자로 우리은행의 자산이 급증하면서 부실의 징후가 있을 때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실제로 금감원은 2007년 우리은행에 대한 종합 검사에서 파생 상품 투자 손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가 올해 6월 검사에서 위험 관리 규정을 위반했다고 뒤늦게 지적한 것. 감사원도 지난해 우리금융에 대한 공적자금 감사 때 황 회장의 투자 실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예보도 지난해 4월 예보위에서 우리은행이 당시 4000억 원가량의 파생 상품 투자 손실을 본 것을 알고 투자 결정에 관여한 IB 담당 부행장은 정직 처분했지만 현직을 떠난 황 회장에게는 성과급 차감 조치만 내렸다.이에 대해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파생 상품 시장이 제대로 발전하지 않고 감독 체계가 미흡한 상태에서 결과적으로 투자 손실이 났다고 해서 담당자를 처벌하는 것은 감독 당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밖에 안 된다”며 감독 당국도 함께 징계해야 한다고 말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건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은행이 잘못된 투자로 손실을 보고 그로 인해 부실이나 대규모 인출 사태가 생기면 결국 국민의 세금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예금자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금융회사에 어느 선까지 투자를 허용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다른 한쪽에서는 은행 고위직의 대출 관여 등 나쁜 관행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많이 사라졌듯 이번 사건은 금융 당국과 금융회사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한편 황 회장은 이번 중징계와 관련, 금융위에 재심을 청구할 것으로 예측된다. 행정소송으로 정면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자진 사퇴는 희박하다는 관측도 있다. 사퇴할 경우 은행법 위반 등에 대한 금융위의 징계 내용을 수용하게 돼 예보가 청구 예정인 손해배상소송에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황 회장도 섣불리 법적 대응에 나서기는 힘들어 보인다. 정부와 금융 당국의 입장이 워낙 확고하다 보니 황 회장으로서는 실익을 얻기가 힘들다는 관측이 강하기 때문이다. 황 회장은 앞으로 한 달 이내에 금융위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가 최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박신영·한국경제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