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아버지를 탓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박봉의 경찰공무원으로 평생을 다섯 자식 키워주신 것만도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난 ‘아버지’ 그 자체에 대한 존재감에 감사할 따름이다.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목소리가 없다. 유년기를 더듬으면 파란 경찰 제복을 입은 모습은 생생한데, 목소리가 없다. 따지고 보면 집에서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도 많지 않다. 학교에 갔다 오면 잠들 때까지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언제 오셨는지 큰방에서 코 고는 소리만 들렸다.아버지는 한평생을 경찰로 재직하셨다. 우리와는 낮과 밤이 달라 집에서 얼굴을 마주 뵌 적조차 많지 않다. 가끔, 심부름으로 경찰서를 찾으면 지하실에서 ‘돈쓰돈돈, 단쯔단단…’ 무전기를 두드리는 모습은 뵙곤 했다. 시골 지서장 시절 잘 다려진 정복을 입은 모습은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마치 앨범 속 사진처럼 정지된 모습으로 반듯하게 각인돼 있다. 지서 뒤쪽 사택에서 살았지만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얘기한 기억은 없다.그렇듯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며 자랐다. 그런 동거 불언(?)의 아버지와 난 살아오면서 ‘세 번의 대화’를 했다.그 첫 번째는 중3 때 고입 원서를 쓰기 위해 학교로 가는 버스 속이었다. 역사적인 발언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생각한 진로는 상고(商高)였다. 상고를 나와 은행에 취직하는 게 오래전부터 정해진 코스였다.그런데 원서를 쓰는 날, 그것도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도 맏아들인데 대학은 가야겠지.” 그 한마디에 졸지에 고졸로 끝날 내 인생이 대졸로 바뀌었다.그리고 이내 문은 닫혔다. 스무 살 청년이 될 때까지 같은 남자로서의 조언 역시 들은 바 없다.1986년 스물여섯이 되면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객지 생활이 어른들에겐 걱정거리였는지 대구에 내려가면 반드시 맞선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선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왜 그리도 싫었던지. 형식적으로 선을 보거나 펑크를 내가며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버텼다. 10여 년 만에 아버지가 두 번째 입을 여셨다. “결혼할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된다”며 ‘배필 선택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하신 것이었다.뜻밖의 지침서 때문인지 그 기준에 맞추느라 결혼이 늦어졌고 결혼하고도 맞벌이하느라 서른다섯이 되던 1995년에 첫아들을 낳았다. 명색이 엄마 아빠가 모두 국어국문과 출신인지라 직접 이름을 지었다. 곧을 시(是)에 밝을 현(炫), ‘시현’이라고 지었다.며칠 뒤 대구에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종이쪽지를 하나 내미셨다. 기둥 주(柱)자에 빛날 영(煐)자가 적혀 있었다. 집안에 기둥이 되고 앞으로 인생이 잘돼야 한다며 첫째 이름을 지어오신 것이었다.그것이 5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면서 아버지가 내게 건네신 말씀의 전부다. 내년이면 팔순이어서 이젠 기력까지 달려 여장부 같은 어머니 목소리에 묻혀 아예 목소리가 없으시다. 참 무관심한 아버지였다. 그렇다고 한 번도 아버지를 탓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박봉의 경찰공무원으로 평생을 다섯 자식 키워주신 것만도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머니는 ‘술과 화투만 멀리했어도 자식들에게 좀 더 잘해 줬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난 ‘아버지’ 그 자체에 대한 존재감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들 둘을 둔 나는 아버지와 정반대다.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인 두 아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간혹 언론에서 훌륭한 아빠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1주일에 1시간 대화하기’ 따위를 보면 웃음이 난다.그런데 요즘 들어 엉뚱한 고민이 생겼다. 적어도 아버지보다는 자식 사랑과 교육 방식이 낫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머리 커진 아이들의 언행이 불안하다. 혹 저놈들이 내 나이가 될 때 ‘말 없는 아버지’보다 ‘말 많은 아빠’의 평점을 낮게 매기지나 않을까. 이번 추석에 내려가면 아버지께 먼저 말을 건네며 손을 꼭 잡아드려야겠다.1961년생이다. 89년 경향신문사에 입사한 뒤 99년부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경기도 사무처장을 지냈다. 현재는 새로운 시스템의 미술품 거래를 추구하는 오픈아트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미술품가격정보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