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원칙이 많다는 것은 원칙이 없다는 말과 같은 거죠.”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발표한 다음날인 8월 25일 기획재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이는 정부가 올해 세제개편안의 기준을 네 가지나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민 지원 확대, 미래 성장 동력 확충, 고소득·전문직 과표 양성화 제고, 재정 건전성 확보 등이 그 원칙들이다.게다가 이 원칙들은 서로 공존하기 힘든 성격을 띤다. 서민 지원을 확대하면서 재정 건전성을 확보해야 하며, 고소득층의 지갑을 닫게 만드는 세제 방안을 내놓으면서 내수를 진작시키겠다는 의지도 갖고 있다. 한편으론 세금을 깎아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금을 더 걷겠다는 것.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여러 가지 정책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다 보니 세제개편안이 복잡하게 됐다”고까지 토로했다.사실 정부는 출범 이후 세금을 깎아 경제를 살리겠다며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내리는 일관적인 감세 정책을 펴 왔다. 그 예로 지난해는 21조 원이 넘는 감세 조치를 내놨다. 그러나 올 들어 세수 부족 우려가 고개를 들자 감세 정책 유보와 증세 필요성을 들고 나오게 됐고, 세수 확보를 위한 타깃을 고소득층과 대기업으로 잡은 것이다.실제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올해 35조 원의 적자 국채를 찍어내면서 전체 국가 부채는 1년 사이에 60조 원 가까이 늘어 366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국가 부채 비율은 30.1%에서 35.6%로 크게 높아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올해 마이너스 3.2%에서 내년 마이너스 4.7%로 떨어져 G20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이에 따라 정부는 8월 25일 당정 협의와 세제발전심의위원회를 열고 고소득자와 대기업에 증세하는 ‘2009년 세제개편안’을 내놨다. 이 세제개편안이 국회에서 원안대로 통과되면 내년 7조7000억 원 등 향후 3년간 10조5000억 원 정도 세수가 늘어난다. 이 중 고소득자와 대기업이 부담하는 비중은 90.6%(9조5000억 원) 수준이다.정부는 설비 투자금액을 세금에서 깎아주는 임시투자세액공제 제도를 예정대로 연말에 폐지하고 지난해 세제개편 당시 완화했던 대기업에 대한 최저한세율(각종 공제를 받아도 최소한 내야 할 세금)도 다시 강화하기로 했다. 이 두 가지로만 대기업은 2조 원에 가까운 세금 부담을 안게 된다.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고소득 전문직에 대해서는 건당 30만 원 이상 거래 시 신용카드나 현금영수증 등을 의무적으로 발급하도록 해 탈세를 막기로 했다.대신 서민과 저소득 근로자, 농어업인 등에 대해서는 세(稅) 감면 혜택을 대폭 늘렸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중소기업에 근로자 1인당 30만 원씩을 법인·소득세에서 빼주는 혜택을 올해 12월까지에서 내년 말까지로 1년 더 연장할 방침이다.또 장기 임대주택과 신축 임대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 감면 혜택도 올해 말에서 내년 말로 연장할 계획이다. 올해 말로 일몰이 도래하는 장기주택마련저축 비과세 혜택과 장기주식형저축 소득공제제도, 퇴직소득에 대한 세액공제, 농업회사법인 및 영어조합법인 등에 대한 법인세 면제 등도 1년 더 연장할 것으로 알려졌다.이렇다 보니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일각에선 연말 재·보선과 내년 상반기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잡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감세를 기조로 한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면서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세금 감면을 해주면 윗물이 아래(서민과 중산층)로까지 흘러 경제 전체가 살아날 것”이라고 했던 정부의 설명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경제 위기로 인한 세입 감소와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로 나라 빚이 급증하는 현실을 보면 증세는 불가피하다. 지금 상황에서 겪을 서민들의 고충을 생각할때 세금을 더 걷는다면 주로 고소득자와 대기업의 부담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하지만 이런 부담이 경기 회복을 이끌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무리하게 간다면 계층 갈등과 경기 회복 둔화라는 부작용도 부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박신영·한국경제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