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된 재정적자
선진국 중에서도 재정적자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는 일본이다.2008년 말 일본의 누적 재정적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160%인 850조 엔에 이른다. 1990년대 ‘10년 불황’ 때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재정지출을 크게 확대한 결과다. 최근에도 일본 정부는 경기 진작을 위해 재정을 적극적으로 투입하고 있어 적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일본의 재정적자 규모가 2009년엔 GDP의 174%, 내년에는 194%로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더욱 심각한 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정적자를 해소하려면 세수를 늘리거나 정부 지출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모두 여의치 않다. 일본 정부와 여당은 당초 세수 확대를 위해 현행 5%인 소비세를 인상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총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 지출 축소도 지금과 같은 경기 침체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다.◇ 국제통화기금(IMF)은 5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연례 실사를 마친 직후 일본의 재정적자에 대해 우려를 전달했다. IMF는 2014년 일본의 재정적자 규모가 GDP의 7.1%로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가장 클 것으로 전망하고 “일본이 대규모 공공 부채에서 벗어나려면 중기 재정 회복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재정지출 방법을 전면 재검토하고 포괄적 세제 개혁도 필요하다”고 권고했다.국제 신용 평가 회사인 무디스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 정부가 발행한 외화 채권을 사들인 외국 투자가들이 일제히 상환을 요구할 경우 일본 정부는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무디스는 또 “세계무역 침체 등으로 일본의 재정적자가 일시적으로 크게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며 “일본이 1조 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보유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채무와 비교하면 많다고 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무디스는 일본의 장기 외화표시채권의 신용 등급을 기존의 ‘Aaa’에서 ‘Aa2’로 두 단계 낮췄다.일본 정부도 심각성은 알고 있다. 요사노 가오루 일본 금융·재무·경제재정상은 “(재정이) 흑자로 돌아서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라며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 GDP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을 낮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인정했다.정부 내에서도 기존 공공 부채 감축 공약을 재개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일본 재정시스템위원회는 “일본의 재정 건전성이 극도로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다”며 “금융 위기에 따른 막대한 부양책 지출과 세수 감소로 2011년까지 재정 흑자를 달성하겠다는 기존 목표가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학계와 기업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제재정정책위원회 위원들은 정부가 GDP 대비 적자 비중을 재정정책 목적의 주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 후지오 도요타자동차 회장과 요시카와 히로시 도쿄대 교수 등은 정부가 각각 5개년과 10개년 계획을 세워 2개 기간에 걸쳐 재정적자 축소 준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당장은 재정적자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딜레마다. 일본은 세계경제 침체에 따른 경기 급락을 막기 위해선 재정지출을 줄일 수 없는 처지다. 최근 일본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 있다. 지난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의 무역수지는 7253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다. 1980년 이후 28년 만에 무역적자를 낸 것이다. 올 1분기(1~3월)에 GDP 성장률도 전기 대비 마이너스 14.2%(연율 기준)를 기록하면서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기미마저 보이는 상황이다.일본 정부는 작년 하반기 이후 총 25조 엔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다. 재원 중 상당액은 적자 국채 발행으로 조달된다. 상황에 따라선 추가로 재정을 투입하는 경기 대책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이런 상황이어서 재정적자 문제 해소는 일본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일본 정부는 내부적으로 재정 건전화를 위한 기초재정수지 균형 목표 시기를 당초 2011년에서 2018년으로 늦추는 것을 검토 중이다. 기초재정수지는 정부의 수입과 지출에서 국채 발행분과 국채 원리금 상환액을 빼고 순수한 세금 수입과 일반 지출만을 따지는 것이다. 기업으로 따지면 본업으로만 얼마큼 쓰고 벌었느냐를 보여주는 영업이익과 같다.2018년의 기초재정수지 균형을 위해서도 일본 정부는 현재 5%인 소비세율을 12%까지 인상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소비세율을 2011년부터 매년 1%씩 높여 12%까지 인상해야 비로소 기초재정수지 흑자를 2018년께 달성할 수 있다.일본은 2006년의 경제 재정 기본 방침에서 기초재정수지를 2011년까지 흑자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세계적 경제 위기에 따른 경기 부양책 시행으로 재정적자가 확대됨에 따라 이 목표 달성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 원안에서는 재정 재건 목표로 중앙과 지방의 채무 잔액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2020년대 초까지 낮춘다는 계획이다. 올해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163.3%다. 일본 정부는 소비세율을 12%로 인상하면 이 비율을 2023년에는 159.8%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계획도 쉽지만은 않다. 경기 침체가 예상보다 길어지면 소비세 인상은 어려워진다. 또 정권 교체 여부를 놓고 여야가 다투는 중의원(하원 격) 선거가 오는 9월 이전에 예정돼 있다는 점도 재정적자 문제를 푸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특히 아소 다로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은 경제 회복이 늦어지면서 지지율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이는 결국 재정적자 악화로 귀결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물론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고심하는 건 일본 만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각국들도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처지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미국의 재정적자는 2009 회계연도 상반기(2008년 10월∼2009년 3월)에만 9530억 달러로 1조 달러에 육박했다. 지난해 회계연도 같은 기간보다 3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올해 전체적으로는 지난해 회계연도의 4배에 달하는 1조8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최근 의회와 행정부에 재정적자를 줄여나가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촉구할 정도다. 투자자들의 재정적자 우려로 미국 국채 수익률이 급등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에서는 미국 정부가 적자를 제어하지 못하면 미국이 누리는 최고 국가 신용 등급(AAA)이 강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관대한 사회보장 정책으로 만성적 재정난에 시달려 온 유럽도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곳간’이 더욱 비었다. 금융권 구제와 양적 완화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 독일 프랑스 등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주요 8개국의 GDP 대비 재정적자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정한 상한선인 3%를 넘은 지 오래다.작년 11월 200억 파운드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내놓은 데 이어 올 상반기 1250억 파운드 규모의 양적 완화를 실시한 영국은 올해 재정적자가 1750억 파운드로 GDP의 12.3%에 달할 전망이다. 자동차 산업 보호 등에 260억 유로를 투입한 프랑스는 올해 재정적자 규모가 GDP의 6.5%에 육박, 12년 내 최고치에 도달했다. 수출 급감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로 가뜩이나 세수가 감소한 독일은 금융권 유동성 지원에 5939억 유로를 투입하면서 재정난이 더욱 악화됐다.IMF에 따르면 올해 영국(GDP의 62.6%) 독일(69.6%) 프랑스(72.4%) 등 유로 지역의 정부 부채 규모는 GDP의 72.7%에 육박할 전망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