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 펀드의 세계

‘국부 유출의 마지막 보루인가. 토종 기업 사냥꾼인가.’사모 펀드에 대한 시각은 이처럼 극단적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같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모 펀드의 특징이며 매력이기도 하다. 외신마다 사모 펀드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대주’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양면성에서 출발한다.소수의 투자자에게만 이익을 나눠주기 위해 기업을 사들인 후, 알짜 자산은 매각하고 무자비하게 구조조정을 벌인다는 것도 분명 사모 펀드의 단면 중 하나다. 미국의 대표적 기업 사냥꾼인 커크 커코리안과 칼 아이칸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사모 펀드가 기여하는 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고사 직전 기업의 환부를 도려낸 뒤 극적으로 회생시킨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고용 시장 안정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사모 펀드는 펀드를 운용하는 운용사(무한책임회사-GP)와 자금을 지원하는 투자자(유한책임회사-LP)로 구분한다. LP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투자 대상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역할은 순전히 GP의 몫이다. 칼라일,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 블랙스톤, 보고인베스트먼트, MBK파트너스 등은 모두 GP다. 사모 펀드는 LP 자금으로 GP가 주도가 돼 만든 펀드일 뿐이다. 국내 사모 펀드 시장이 태동한 것은 지난 1998년 간접투자자산운용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이후 2004년 사모투자전문회사(PEF) 제도 도입을 위한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국내 사모 펀드 시장에 법적·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당시 사모 펀드 관련 법령이 제정된 것은 론스타, 칼라일, 뉴브릿지캐피탈 등 해외 대형 사모 펀드들이 전체적인 인수·합병(M&A)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 성격이 짙다. 이 때문에 초창기 사모 펀드는 기업 구조조정 측면에 국한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부실기업을 인수해 경쟁력을 재조정한 뒤 재매각하는 바이아웃 성격의 투자 펀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발달된 해외에서 사모 펀드는 단순한 구조조정보다 신생 벤처기업의 잠재력을 판단해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에서부터 유동성 압박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 자금을 지원해 주는 메자닌 펀드(주식과 채권의 중간 상품에 투자하는 중위험 펀드)까지 다양하다. 크게 사모 펀드는 주식형과 부채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신생 기업의 지분을 매입하는 대신 자금을 지원해 주는 벤처캐피털 펀드가 이에 해당한다.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주도가 돼 설립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는 벤처 캐피털에 기반을 둔 토종 사모 펀드 운용사(GP)다. 경영권을 인수해 재매각하는 전통적인 LBO(Leverage Buy Out) 펀드도 주식형 PE(Private Equity)에 속한다. 반면 채권 형태로 자금을 지원해 주식으로 전환하는 메자닌 펀드와 부실기업의 채권을 인수해 기업을 정상화한 뒤 출자 전환 형식으로 수익을 거두는 벌처 펀드 등은 부채형 PE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지금과 같은 글로벌 금융 위기나 경기 침체기에는 LBO 펀드와 메자닌 펀드가 각광 받지만 경기가 최악을 치달아 파산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 벌처 펀드로 대표되는 부채형 사모 펀드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사모 펀드는 단기 차익보다 5년 이상 중·장기 자금을 운용해 수익을 번다는 점에서 헤지 펀드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이런 이유로 투자 자금 성격도 정부기금, 일반 연기금, 대학발전기금, 개인 거액 자산가(Wealth Family) 등으로 한정돼 있다.그렇다면 이들 사모 펀드가 주목하는 물건은 어떤 것일까. 최근 산업이 다변화되면서 물건을 선택하는 대상도 다양해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제조업에 기반을 두면서 △현금흐름(Cash Flow)이 명확하고 △회사 경영 전반을 책임질 수 있는 기업을 우선 고려한다. 이와 함께 부동산과 같은 실물 자산이 많아 금융권 대출(Leverage)을 일으키기 쉽고 △경영상 비효율적 요소가 명확한 곳일수록 유리하다. KTB투자증권 구본용 전무는 “오너와 관련된 경영 비효율성만 개선해도 매출이 20~30% 개선된다”며 “사모 펀드들이 하반기 주목하는 매물도 무리한 구조조정으로 단기 유동성을 겪는 곳”이라고 설명했다.문제는 돈이다. 사모 펀드의 성패는 사실상 여기서 결정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쉽게도 국내 사모 펀드 운용사들은 최근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은행 보험 증권사를 통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대부분의 사모 펀드들은 국민연금 사학연금 군인공제회 등 연기금에 호소하고 있지만 이 또한 경쟁이 치열해 상황이 여의치 않다.투자 손실로 은행, 연기금 등의 기관투자가들이 안전 자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토종 사모 펀드들은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부실채권 정리와 자기자본비율 확충이 뒤로 밀리면서 ‘자금 편중’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민연금이 대체 투자(AI) 비중을 3.9%에서 6.0%로 올리면서 사실상 국내 사모 펀드 시장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자산운용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모 펀드를 만드는 클럽 딜도 대부분의 자금줄이 ‘국민연금’이어서 논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금산법과 공정거래법 등 각종 규제로 대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오는 것도 현재로선 벽에 막혀 있다.이러는 사이 글로벌 대형 사모 펀드들은 막대한 자금을 해외에서 조달해와 국내 M&A 시장에 본격 참여할 움직임이어서 토종 사모 펀드들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자금줄을 마련하지 못하면 올 하반기 M&A 시장은 ‘외환위기 재판’이 될 수밖에 없다. M&A 시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사모 펀드 자산운용사들이 대거 설립되고 있지만 돈줄이 씨가 마른 상태에선 수익률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매물은 늘어나고 관련 운용사들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지만 돈이 없어 먹잇감만 쳐다보는 것이 현재의 솔직한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결국 해법은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 1조 원이 넘는 매물에 단독으로 참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외국계 사모 펀드가 들어올 수 없는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최근 BC카드 우선 협상자로 선정된 보고인베스트먼트가 좋은 사례다. 금융회사들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BC카드는 그동안 사모 펀드 시장에선 주목받지 못했던 매물이었다. 3년 반에 걸쳐 인수 작업을 진행한 끝에 보고인베스트먼트의 보고펀드는 BC카드 인수에 막바지에 다다랐다. 한 글로벌 사모 펀드 관계자는 “앞으로의 대세는 글로벌 펀드(Global Fund)도 지역 펀드(Region Fund)도 아닌 로컬 펀드(Local Fund)가 될 것”이라며 “한국 기업과 시장을 잘 안다는 것은 한국 토종 사모 펀드들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점”이라고 말했다.물론 제도 보완도 시급한 문제다. 자본시장법상 사모 투자 전문 회사가 해당 기업의 지분을 10% 이상 취득하거나 기업 지배가 가능할 정도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관련 업계에서 한목소리로 시정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규제다. 자본시장연구원 빈기범 박사는 “바이아웃이 아닌 메자닌, 부실채권, 벤처캐피털 투자는 경영권 추구가 목적이 아니다”면서 “사모 펀드가 활성화된 미국과 유럽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조항”이라고 말했다. 빈 박사는 “파생상품에 대한 제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모 펀드에 대한 완전 규제 철폐를 요구하기는 힘들겠지만 대체적으로 자산운용사는 규제하고 펀드에 대해서는 완화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면서 “토종 사모 펀드 육성을 위해서도 제도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송창섭 기자 realso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