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 당기는 대미 관계

“중국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G2(중국과 미국)론은 전혀 근거 없는 발상이다.”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지난 5월 20일 체코 프라하에서 중국과 유럽연합(EU) 간 정상회담이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나 던진 발언이다. G2와 관련해 중국 고위 관료의 첫 번째 공개 발언이기도 하다. 중국 위협론과 패권론이 거세질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G2 간 관계 변화는 이미 세계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중국과 미국은 통상 분야에서는 이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반면 기후 환경 에너지 등에서는 공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G2 간 마찰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분야는 무역이다. 중국산 철강을 놓고 정면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미국이 중국산 철강에 대해 반덤핑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지만 중국은 철강 수출을 늘리기 위해 자국 업체에 증치세(부가가치세)를 더 돌려준다는 방침을 정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최근 유전 개발에 사용되는 중국산 강관을 대상으로 미 상무부가 반덤핑 조사를 개시하도록 허가했다. ITC 위원 6명은 중국산 강관이 부당하게 미국 업계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를 들어 만장일치로 이같이 결정했다.이에 따라 이르면 연내 중국산 강관을 대상으로 최고 99%의 반덤핑관세가 부과될 전망이다. 중국이 지난해 미국에 수출한 유전 개발용 강관은 전년의 3배 수준인 26억 달러에 달했다. 미 의회 산하 기관인 ITC의 이번 결정은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한 중국 정부 대표단이 중국산 철 파이프 반덤핑 조사에 대한 미 업계의 요청을 기각하도록 ITC에 요구한 데 이어 5월 20일 중국을 방문한 ITC 대표단에도 미 보호무역주의를 억제하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미국의 입장이 강경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그러나 중국 정부는 철강 수출 보조를 늘리기로 하는 등 정면 대결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중국 철강협회 관계자는 공업 및 정보화부가 철강 제품 수출증치세의 환급률을 올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했다.철강협회는 수출증치세 전액을 돌려주는 것과 함께 일부 철강 제품에 대한 수출관세 철폐를 건의했다. 중국은 지난해부터 5차례 철강 수출증치세 환급률을 인상했지만 냉연강판 등의 경우 현재 13%로 환급 한도인 17%에 크게 못 미치고 있고 열연강판은 수출증치세 환급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과잉생산을 억제한다는 이유로 일부 철강 제품에 대해서는 수출관세까지 물려 왔다.중국은 지난 2006년 철강 수출국으로 돌아선데 이어 지난해 600억 달러의 철강을 수출해 세계 최대 철강 수출국으로 떠오르면서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EU) 등과 무역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업계는 올 들어 4월까지 철강 수출 물량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가량 감소하고 한국의 원화가치 절하로 한국산 철강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다며 수출 지원책을 요구해 왔다.특히 중국 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 부양 법안에 미국산 철강 등을 구매하도록 한 ‘바이 아메리카 조항’에 대해 보호주의라고 강하게 비난해 왔다. 중국산 철강을 놓고 벌이는 G2 간 정면 대결 양상은 다른 제품의 양국 간 무역 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상징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미국이 주문하는 대로 내수 진작책에 집중해 온 중국 지도부는 최근 들어 고강도 수출 지원책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중국 상무부의 야오젠 대변인은 최근 “중국 기업이 공정하게 국제 경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며 “수출증치세를 전액 돌려받는 건 중국 기업의 정당한 권리이자 합리적인 요구”라고 말했다.왕치산 중국 부총리는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산 점유율을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안화를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해 가격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높여 왔다는 미국의 비판이 무색해지는 행보다. 중신은행의 환율 전문가인 양성쿤은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의 방중(5월 31일~6월 2일)을 앞두고 수출 보호를 위해 위안화를 절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심지어 지난 5월 27일에는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국무원(중앙정부) 상무회의를 열고 수출 진흥을 위한 6대 지원책을 승인했다. 우선 올해 수출 신용보험료를 낮추는 것은 물론 단기 수출 신용 보험을 위해 840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기로 했다. 무역금융 예산도 올해 100억 달러를 확보하고 달러 대신 위안화 무역 결제를 서둘러 수출에 따른 자금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 또 경쟁 우위가 있는 제품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제품과 노동집약형 제품에 대한 수출 관련 세제 혜택도 늘리기로 했다. 수출 과정에서 부담하는 수수료도 전면 정리하기로 했다. 중국의 이 같은 수출 부양책은 G2 간 무역 분쟁의 강도가 높아질 것임을 예고한다. G2 관계에 삭풍만 불고 있는 건 아니다. 기후 에너지 환경 등에서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최근 방중한 존 캐리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오는 11월 중국을 방문해 양국 간 청정에너지 관련 협력 계약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중국 정부가 2020년까지 4조 위안(720조 원)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진 풍력 등 신에너지 시장을 선점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특히 2012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신할 새로운 기후변화협약을 놓고 중국과 미국 등 선진국이 벌이던 긴장감도 최근 들어 크게 수그러드는 분위기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최근 중국을 방문,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을 갖고 오는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릴 포스트 교토의정서를 위한 기후변화협약회의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의 인권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해 온 펠로시 의장은 8일간의 방중 일정에서 인권 문제를 극도로 자제했다. 지난해 인도에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을 요구할 만큼 반중파 모습을 보이던 펠로시 의장이 변심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펠로시 의장은 이를 의식해서인지 깨끗한 환경에서 살도록 하는 기후변화협약 문제 역시 인권 문제라고 해명했다.특히 중국은 미국에 대한 온난화 가스 감축 요구 강도 수위를 낮추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2020년까지 1990년 기준으로 온난화 가스를 40% 감축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해 왔다.하지만 최근 중국의 기후 정책 담당 고위 관료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오는 12월 코펜하겐 회의에서 미국이 구체적인 감축 목표를 제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기후변화협약 문제를 놓고 G2 간에 대타협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티븐 추 미 에너지부 장관은 “기후변화협약을 놓고 이제는 말은 줄이고 행동을 늘려야 한다”며 “미국은 중국 등이 원하는 대로 가장 먼저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스티븐 추 장관은 온난화 가스를 규제하지 않는 중국 등에서 만든 제품을 수입할 때 탄소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말해 중국으로부터 그린 보호주의라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사람이다. 중국은 최근 올해 경제 체제 개혁 계획을 발표하면서 환경세 징수를 검토한다고 밝혀 미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