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중 특별기획: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⑨ - ‘1주 1표제’ 절대선인가

모든 주주는 평등할까. 창업자는 모든 위험을 무릅쓴 모험 투자로 기업을 일으킨다. 반면 매매 차익을 노린 단기 투자자는 기업의 역사에 밴 땀과 눈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주 1표제라는 ‘신성한’ 원칙 아래서 이들은 똑같은 권리를 행사한다. 이는 오늘도 수많은 기업이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1주 1표제는 ‘미국적’ 현상일 뿐이다. 유럽에는 창업자와 경영진에게 더 많은 권리를 허용하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고수하는 기업이 상당수다. 국내에서도 차등주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보유 기간에 따라 투표권을 다르게 주는 ‘프랑스식 차등주’, 즉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이 유력한 대안으로 꼽힌다.글 싣는 순서1부.경제성장 원동력 ‘기업가 정신’2부.다시 생각하는 ‘경영권 승계 논란’1회. 손질 필요한 상속세제2회. ‘1주1표제’ 절대선인가3회. 오너 경영, 선도 악도 아니다4회. 200년, 300년 기업 만들자지난 2004년 기업공개(IPO)를 하며 구글의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투자자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공개 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우리는 외부인이 구글을 인수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더 어렵게 하는 기업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구조는 경영진이 장기적이고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따라가는 것을 더 쉽게 만들 것입니다. 학문적 연구들은 순수한 경제적 관점에서 차등의결권 구조가 기업 주가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주식은 경제적 권리는 동일하며 다만 의결권만 차이가 날 뿐입니다.’편지는 자신들이 ‘1주 1표’라는 주주 평등의 원칙을 깨고 차등의결권 제도를 선택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글은 기업공개에서 두 종류의 주식을 발행했다. 일반 투자자들이 살 수 있는 A주에는 1주에 1표씩 의결권이 주어진다. 반면 창업자들이 소유하는 B주는 1주에 10표를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구글의 이런 결정은 ‘주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월스트리트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배타적 권리를 손에 쥔 창업자들이 주주들을 무시한 채 마음대로 회사를 경영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글의 두 창업자는 누가 뭐래도 자신들의 ‘철학’을 밀고 나갔다. 이들의 편지에선 ‘싫다면 구글 주식을 사지 마라’는 강한 자신감마저 묻어난다.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으로 성장한 구글은 여러모로 독특한 기업 문화를 자랑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호세 인근의 구글 본사는 당구대와 장난감이 뒤섞여 있어 회사라기보다 자유분방한 캠퍼스를 연상시킨다. 하루 수억 명이 방문하는 검색엔진이 됐지만 금싸라기 같은 초기 화면에 달랑 검색창 하나만 배치하는 초창기 원칙을 아직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단순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기업 홈페이지에는 ‘악해지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You can make money without doing evil)’는 경구를 자랑스럽게 올려놓기도 했다. 수많은 인공위성을 동원해 우리 시야를 지구 차원으로, 또 바다 속과 우주로 확장한 파격적인 서비스 ‘구글 어스’는 이런 창의적인 기업 문화에서 탄생한 것이다.차등의결권 제도는 이처럼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외풍에 휘둘리지 않고 애초 자신들이 품었던 기업 철학을 과감하게 펼쳐나갈 수 있는 든든한 방어막이 됐다. 주가 상승과 단기 차익을 원하는 변덕스러운 주주들의 요구에 시달렸다면 구글은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구글 창업자들은 26%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의결권은 77.9%를 행사할 수 있다. 소유 주식 대부분을 B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차등의결권의 이점은 한때 인터넷을 호령하던 야후의 엇갈린 운명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지난해 인터넷 업계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정보기술(IT) 업계의 거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야후 인수·합병(M&A) 시도였다. MS는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구글을 견제하기 위해 야후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다급해진 야후는 인수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임워너, 뉴스 코퍼레이션 등과 손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구글 이전 최고의 인터넷 기업이던 야후는 하루아침에 적대적 M&A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이다.반면 구글은 담담했다. MS의 야후 인수설로 주가가 하락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MS가 야후 대신 구글을 탐낸다면 어떻게 될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창업자들이 10배의 의결권이 있는 B주를 손에 쥐고 있는 한 누구도 쉽게 구글의 경영권을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차등의결권 제도는 언뜻 보면 상당히 기이해 보인다. ‘1주 1표’라는 신성한 원칙을 허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1인 1표’라는 평등 원칙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1주 1표’는 주주 민주주의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차등의결권 제도는 ‘열등’ 주주를 만들어 내고 선택된 소수에게 기업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을 넘겨준다. 주식에 ‘귀천’과 ‘계급’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될까. 하지만 ‘각국 지배구조의 결정 요인 비교’ 보고서를 낸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1주 1표제는 민주주의 평등 개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1주 1표’는 주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많은 표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1인 1표’와는 정반대다. 이는 1주 1표제가 결코 신성불가침의 원칙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김 위원은 “차등의결권 문제는 창업자가 갖는 역할과 주식시장의 순기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는 관점에서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미국 2위 자동차 기업 포드는 차등의결권 제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포드는 지난 1956년 주식시장에 상장할 때 특별 정관에 차등주 규정을 집어넣었다. 이 덕분에 포드 가문은 현재 지분율이 3.7%에 불과하지만 40%의 의결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기업 사냥꾼이 포드를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안정망 역할을 한다.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억만장자 커크 커코리안은 지난해 포드 지분 6.5%를 사들였다. 지분율에서 포드 가문을 무려 2.8%포인트 차이로 따돌렸다. 하지만 포드 가문이 40%의 안정적인 의결권을 틀어쥐고 있어 그가 경영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커크 커코리안은 지난해 말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철수했다. 이는 수년 전 그가 GM을 공격해 경영진을 쥐고 흔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포드는 미국 자동차 업계의 몰락 위기 속에서 상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유럽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미국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채택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유럽 300대 상장기업 가운데 20%가 다양한 형태의 차등의결권 제도를 갖고 있다.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확산과 함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한동안 ‘1주 1표제’ 확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는 각국마다 제각각인 차등의결권 제도가 EU 공동시장 형성에 장애 요인이 된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그러난 지난 2007년 이후 EU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노력을 포기했다. 유럽연합지배구조기구(ECGI)는 보고서에서 “지금까지는 불균등한 투표권이 사회적 비용을 높이고 기업 가치를 훼손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다. 현재 EU는 의결권 제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상태다.유럽에서 차등의결권 제도가 가장 활성화된 나라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다. 유럽 300대 기업 가운데 차등주를 발행하고 있는 프랑스 기업은 29개에 달한다. 이 중에는 보험회사 악사를 비롯해 미쉐린, 푸조, 르노, 토탈, 수에즈, LVMH, 소시에떼제네랄 등 주요 기업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최근 로레알과 톰슨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폐지했지만 다른 기업들은 여전히 이를 지지하고 있다.네덜란드는 유럽 300대 기업 21개 가운데 14개가 차등의결권 제도를 갖고 있다. ABN암로, ING그룹, 유니레버가 대표적이다. 스웨덴 역시 차등의결권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럽 300대 기업 16개 가운데 12개가 특정 주식에 1표 이상의 의결권을 허용하고 있다. 유럽 최대의 산업 왕국으로 꼽히는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 인베스터를 비롯해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H&M, 볼보, 아틀라스콥코, SKF 등이 여기에 속한다. 스웨덴은 한때 차등의결권의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1주 10표까지만 허용된다. 2004년 에릭슨도 차등주 의결권을 1주 1000표에서 1주 10표로 대폭 낮췄다.물론 의결권 차등화가 장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무능한 경영자에게 영구 집권 수단을 쥐어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또 경영권 과잉보호는 자본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흔히 말하는 ‘참호 구축 효과’다. 지난 2005년 터진 세계 3위 미디어 재벌 콘라드 블랙의 비리 사건은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전 세계 수많은 언론사를 소유한 홀링거 인터내셔널의 창업자이자 대주주인 그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활용해 30% 지분으로 73%의 의결권을 행사했다. 일반 주주들은 경영진의 과도한 보수나 M&A, 포이즌 필(poison pill: 독약 처방) 도입 등 중대한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회사를 자신의 사금고처럼 이용해 온 콘라드는 결국 935억 원의 회사 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섰다.전반적으로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한 기업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적대적 M&A가 일상화되면서 정반대 흐름도 나타난다. 헤지 펀드의 무차별 공격에 직면한 독일증권거래소는 이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을 검토하기도 했다. 유럽 주요 기업 주주총회에서 차등의결권 폐지 목소리는 여전히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구글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차등의결권을 가진 신생 기업들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기업을 키워낸 창업자들은 상장 후에도 계속해 지배권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문제는 한국의 경우 창업자들이 이러한 선택권을 가질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상법에서 1주 1표 원칙에 어긋나는 주식 발행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차등의결권 제도는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라는 예민한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재계는 2000년대 들어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M&A 위협이 가시화되면서 경영권 방어 수단의 확충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지난 2006년 칼 아이칸과 스틸파트너스 연합의 KT&G 공격은 소수 지분으로 순환 출자에 의존해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차등의결권 도입은 골칫거리인 순환 출자를 털어버리고 경영권을 안정화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다.하지만 기존 상장기업의 경우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주주평등원칙을 전체로 주식을 매입한 다수의 주주들의 반발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식 차등의결권 제도다. 이는 2년 이상 주식을 보유한 주주에게 2표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간단히 말해 보유 기간에 비례해 의결권을 차등화하는 것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2년 이상 보유 주주에게 똑같이 2표를 주기 때문에 일반 주주와의 형평성 논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 투자자 입장에서도 장기 투자한다면 똑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또한 차등의결권을 도입하는 시점에 똑같이 보유 기간을 처음부터 새로 계산하면 논란의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물론 프랑스식 차등주 제도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 단계다. 김우찬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현실적으로 도입이 쉽지 않은 제도”라고 말했다. 핵심은 ‘장기 보유에 따른 혜택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로 모아진다. 의결권 차이를 너무 크게 하면 긍정적인 M&A를 저해해 자본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의결권 차이를 지나치게 좁히면 경영권 방어라는 도입 취지를 살릴 수 없다.법무부는 현재 전문가들로 ‘경영권방어법제 개선위원회’를 구성해 차등의결권 제도를 포함한 광범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