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에버랜드 사건’ 무죄 확정

대법원이 삼성그룹의 ‘편법 경영권 승계’ 의혹 사건에 대해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논란에 짓눌렸던 삼성의 지배구조에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5월 29일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재판부는 삼성SDS의 BW를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제삼자 배정했다면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보고 손해액을 다시 산정하라고 판시했다.이에 따라 손해액을 다시 산정해 손해액이 50억 원을 넘을 때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가 적용돼 유죄가 확정되지만 1심 판결처럼 50억 원 미만일 경우에는 업무상 배임 혐의가 적용돼 공소시효가 지나 면소 판결이 난다.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사건과 관련해 이 회사 전 대표이사 허태학 박노빈 씨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에 따라 ‘삼성특검’이 같은 혐의로 기소한 이 전 회장도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에버랜드 CB 발행이 (제삼자 배정이 아닌) 주주 배정이 분명하고 기존 주주 스스로 실권했다고 봐야 한다. 또 피고인들이 회사의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위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허 씨 등은 1996년 에버랜드 CB를 적정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으로 발행해 이 전 회장의 자녀 재용 씨 남매가 대량 인수하도록 하고 회사에 970억 원대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돼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경영권 편법 승계를 둘러싼 법적인 논란이 일단락됨에 따라 삼성그룹의 경영 구도가 이재용 전무를 중심으로 본격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4월 그룹 쇄신안이 발표된 지 1년이 지나면서 사장단 인사를 통해 대규모 권력 이동이 있었고, 그룹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에버랜드 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는 등 이 전무에게는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진 게 사실이다.올해 41세인 이 전무는 지난해 삼성그룹이 특검 수사를 받으면서 경영 쇄신책을 내놓을 때 최고고객책임자(CCO: Chief Customers Officer) 보직을 내놓고 경영 수업에만 전념해 왔다. 재계 일각에서는 CCO 자리를 내놓은 뒤 주요 해외 거래처와 현장을 챙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전무 중심으로 삼성그룹의 지배 체제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올해 초 이뤄진 대대적인 사장단 인사는 이 전무가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여론의 동향을 살피며 수신(修身)하고 있는 이 전무가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년 1월 쯤 부사장에 오른 뒤 사장을 거쳐 3~4년 후에 그룹 회장으로 변신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애초 이 전무는 올해 부사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에버랜드 사건의 재판 때문에 미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4월 삼성의 쇄신안을 발표했던 이학수 당시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은 이 전무가 주주와 임직원,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영권을 승계하면 불행한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삼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 기업’으로 큰 만큼 경영권 승계에 법적인 문제와 함께 시민사회의 여론도 감안할 것이라는 이 전 회장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 전무가 당장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한다.실제로 삼성이 이미 약속한 지주사 전환과 순환출자 구조 해소 등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전무가 경영 전면에 나서는 행보를 보일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비은행 지주회사의 산업자본 지배를 허용하는 금융산업의구조개선에관한법률(금산법) 개정과 일반 지주회사가 은행을 제외한 모든 회사를 계열사로 거느릴 수 있는 공정거래법 개정 문제도 향후 삼성 지배구조의 향배를 결정할 변수로 남아 있다.재계 관계자들은 이런 주변의 정황을 들어 이 전 회장이 배후에서 현 방식대로 계열사 독립 경영 체제를 이끌면서 이 전무를 점진적으로 경영 전면에 내세우는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